지금 이 시간을 버티면
내게도 좋은 날이 올 거야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의식주 이외에도, 적절한 햇볕과 적절한 사회활동, 그리고 적절한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내게도 좋은 날이 올까?'라는 물음보다는 '내게도 좋은 날이 올 거야'라는 믿음이 좀 더 부드럽고 강력하게 내 삶에 리비도를 불어넣어주니까.
혼자 살면서 가장 외로운 순간은 루틴대로 일하고 운동하고 살아가는 주중이 아니라, 주말에 혼자 있는 시간인 것 같다. 지난 몇 년 동안 주말마다 약속을 잡고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여행을 가고, 그도 아니면 혼자 여행을 가고, 물리적으로 아프기 전에는 혼자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하듯이 그건 진정한 휴식이 되지 못했다. 육체적으로는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늘 혼자인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게 두려웠달까.
남에게 보이려고 살아지는 삶은 싫다고 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있소'라고 주말마다 나의 활동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사람들과의 유대를 확인하면서 오늘 밤도 한 글자 적어본다. 지난 주말엔 길고 긴 만남을 하고 집에 왔는데도 헛헛해서 넷플릭스를 켜고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Eat, Pray, Love'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발리에 그와 함께 갔었던 몇 년 전, 내가 선택한 우붓의 리조트는 괴괴하다 못해 밤이 되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리조트 주변에 면한 엄청난 크기의 숲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한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거기에 함께 흐르는 강에서 래프팅을 하다가 휩쓸려 내려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레저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왠지 좀 그랬다. 뿐인가, '신들의 섬'이라는 애칭답게 발리의 거의 모든 상(statue) 앞에는 신밥 (제물)이라고 할 수 있을 꽃과, 나뭇잎으로 만든 틀 안의 음식들과, 향이 피워져 있었다. 그 모든 풍경은 아름답고 생경했다. 마치 그와 함께 행복한 삶을 꿈꾸던 내가 모래성 위에 집 지은 걸 모르고, 그게 사라져 버릴 신기루인 줄 모르고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던 그 며칠처럼.
우붓의 리조트에서 시내로 가는 셔틀버스 안에서 만난 한 미국 여성은, 어제 혼자 방에서 잠을 자려다 이상한 걸 보았다며 무서워했다. 우리는 이틀 동안 리조트 밖에서 거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우붓 시내에는 마사지를 받는 곳 빼고는 이렇다 할 곳이 없었다. 이틀 후 누사 두아라는 호텔 촌으로 가자, 아웃렛이며, 수상 레저 활동이 가능해졌다. 발리에서의 스노클링은 내가 상상한 것과는 많이 틀렸다. 수심이 2미터만 넘어가도 나는 물이 무서워 조금도 머무르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먼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서 물속에 들어가라고 하는 거였다. 나는 정확히 십 초만에 거의 하얗게 질려서 물 밖에 나왔다. 물만 보면 신난 수달처럼 헤엄치던 그는 날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그는 즐겁고 자유로워 보였다. 물에서 나온 우리는 마사지를 받으러 가는 길에 처음으로 엄청나게 싸웠다. 나는 그와 온 여행에서 천 원, 이천 원 돈 깎자고 마사지 샵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게 싫었다.
별 차이 없는 금액을 두고 발품을 팔던 그는 종내 소리를 질렀다. '너는 애가 왜 이렇게 뭘 아낄 줄 몰라!'
나는 울기 시작했다. 짜증이 났다. 잘 맞아야만 했을 우리가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그와 처음 갔던 워터파크에서 자이로드롭처럼 생긴 기구를 몇 번이고 즐겨 타던 그와, 뚜껑이 닫힌 슬라이드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나. 그의 권유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걸 탔는데, 긴장한 나머지 미끄럼틀 중간 어딘가에서 몸이 움직이질 않아 패닉 했던 나. 그런 순간들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가며 일말의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여행의 남은 마지막 밤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어떤 현지의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현지에서도 쌈직한 가격 치고는 이걸 시켜도, 저걸 먹어도 다 기본 이상은 했다. 그 '가성비'에 그는 매우 만족해했다. 나는 메뉴판을 보다가 와이파이의 패스워드가 'eat, pray, love'인 것을 보고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그깟 사랑이란 것 때문에, 타지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건가. 그 모든 건 환상 아닐까'
사랑은 환상이 맞다. 결혼 또한 '행복한 아내가 되고 싶다는, 내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를 밀어붙여 곁에 있는 사람과 하는 것인 경우도 많다. 나이가 차서,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남자 친구가 떠날 것 같다는 생각에, 혹은 주변에서 밀어붙여서. 그 많은 이유로, 결혼을 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 리즈 (줄리아 로버츠)는 자신을 '행복의 틀'로 밀어 넣지만, 과연 그것이 자신이 원했던 삶인가? 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어떤 파티 후에 남편이 회사를 관두고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에, 눈을 뜬 그녀. 여행 전문 기자였던 그녀는 남편과 함께 떠날 취재 여행에 입을 비키니를 막 샀다고 자랑하는 중이었다). 혼자 떠난 취재에서 그녀는 발리의 유명한 현자 (clairevoyant? palm reader? fortune teller? 그 어떤 이름을 줘도 이상하지 않을 그 사람) Ketut을 만나는데, 그는 리즈에게 몇 가지 예언을 해 주며 너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집으로 돌아온 리즈는 전과 다른 자신의 인생에 대해, 처음으로 신이라는 존재에게 '기도'라는 걸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빛이 답한다. 'go back to bed' 그리고 그녀는 어딘가 불안한 결혼 생활을 함께 부유하던 남편에게 말한다. 'I don't want to be married' 예언대로 그녀는 이혼을 하기 위해, 모기지론으로 산 신혼집과, 자신의 은퇴 연금까지 저당 잡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 장의 비행기 티켓을 사서 떠난다. 그 세 군데의 행선지는 각각, '이태리, 인도, 그리고 발리'이다. 각 도시에의 상징성이 바로 '먹고 (리비도), 기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 (다시 살라)'인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본 영화에서는 그랬다. 삶이 무의미해지면, 즐거울 때 사람들과 먹고 즐기던 음식이 '살기 위해 먹는' 것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우울해지면, 제대로 먹지 않고 잠도 자지지를 않는다. 이태리에서의 리즈는, 자신의 현재 삶에서 결핍된 것을 찾아, 자신만의 리비도를 채워나간다. 단순히 식욕 또는 성욕이 아닌, 살고자 하는 욕구 말이다. 많은 좋은 친구들과 함께 단순한 '섭식' 이상의 즐거움을 느낀 그녀는 인도로 날아간다.
남편과 헤어지고 즉흥적으로 만났던 남자 친구의 영향으로 인도의 한 유명한 Guru (역시 '현자'라고 해석해야 할까)를 찾아 그 기도원으로 가는데, 여기서 사사건건 자기 내면을 건드리는 텍사스 출신 미국 남자를 만난다. 자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이야기를 듣기 싫었던 그녀는, 그에게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 모르는 채, 기도원에서 나날을 보내던 중, 그의 사연을 듣게 된다.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다던 그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남편과 '행복하고 싶었을' 자신의 결혼식을 떠올린다. 서로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로의 '다름'을 무시한 채, 결혼이라는 틀에 갇힌 둘. 그를 용서하자, 그녀 자신도 용서가 된다. 기도를 하러 떠난 그녀는 진짜 자신이 괴로웠던, 인정하기 싫었던 자기 모습과 만난다. 그리고 남편과 헤어져 만났던 연하의 남자 친구에게도 전화를 걸어 이별을 고한다. 맞지 않는 사람, 맞을 수 없는 사람과 내 마음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연애를 하는 건 나를 학대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행복한 상황은 잠시 뿐 나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사람의 곁에서 끊임없이 무너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
그렇게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마침내 다시 발리에 돌아가, Ketut을 만나고 그에게 몇 가지 숙제를 받는다. 예컨대 '간까지 웃을 수 있는' 명상을 하라, '가족 대대로 내려오는 기록을 필사해 달라' 등등의 것이다. 여기서도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Ketut의 가르침을 체화한다. 특히 마을의 약국을 운영하는 여인과 그녀의 딸과 만남은 그녀의 삶에 큰 공명을 일으킨다. 약국에서 만난 브라질 여성의 초대로 발리에 있는 외국인 파티에 초대된 그녀는, 오랜만에 입어보는 드레스가 낯설다. 행이었는지 한 젊은 남성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야밤의 해변으로 나간 그는 그녀를 '육체적으로' 유혹한다. 문득 멈칫하던 그녀는 말한다. 나는 이 대사가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나는 십 년 전에도, 육 개월 전에도 이런 관계를 가졌었어. 이제 더는 못하겠어'.
팬티까지 내린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리즈를 바라보고 그 순간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펠리프 (하비에르 바르뎀이라니! 나에게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이미지가 너무나 강해, 몰입하기 힘들었지만)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하룻밤 불장난 같은 소모적인 관계를 놓아버리자 진실된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둘은 서로의 과거 상처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려 비로소 완전하게 둘을 마주 보게 된다. 영화의 결말은 밝히지 않겠지만, 내게 큰 울림을 주었던 장면은 '사랑하면서도 상처 때문에' 그의 세계에 뛰어들기를 거부하던 리즈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의 반전이라기보다는 너무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깊이 사랑하던 사람과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 서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랑해 버리고서야' 깨닫고 놓아버리는 과정, 그 괴로운 이별 후에 또 누군가를 만나 알아가고 사랑해서 그와 어떤 '약속'을 할 때는, 지난 그 뼈아픈 나날을 되풀이할 수 도 있을 거라는 공포가 당연히 복선처럼 깔리지 않을까.
세상에 무턱대고 장밋빛이기만 한 인생이나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해피엔딩 또한 무수히 많은 모험과 사건, 또는 희생 끝에 오지 않나. 나는 이별 후 몇 년을 어떻게 살았나. 과연 그 후 누군가를 만나고 또 헤어지는 와중에, 진정으로 다시 한번 사랑이라는 심연의 바다에 뛰어들 용기는 있었던 걸까?
삶이 참 재밌는 건, 실제로, 이별 후 2년쯤 후에 출장으로 갔던 인도네시아에서, 금요일 오후에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던 어떤 주말, 나는 다시 발리에 혼자 여행을 간 것이다. 더 재밌는 건, 어떤 행사에서 당첨된 리조트 숙박권으로 이박 삼일 동안 혼자였다는 것이다. 그 48시간 동안 나는 리조트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그 사랑에 아팠던 나를 버리고, 다시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행동보다는, 진짜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용서'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도 훨씬 아프고, 오래 걸렸다. 하지만 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진 이 몇 년의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런 일이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의 글을 쓰지 못했을 테니. 이 영화를 2010년이 아닌 지금, 2020년에 보게 된 건, 어쩌면 내 인생에 또 하나의 행복을 느껴보라는 신의 계시 인지도 모르지 않나. 모든 것에는 그 '때가 있는' 것처럼, 사랑을 소중히 여길 수 있을 때 또다시 아름다운 인연을 주시지 않을까.
그 안의 내 숙제는 진정한 쉼과, 진정한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 그건 아닐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또한, 사랑이 어렵다며 무작정 내빼는 내가 아니라, 용기 있는 내가 돼야 한다는 것 또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