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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삶은 영화 08화

아름다운 흑백영화

Cold War

by 장서율

아름다운 흑백 영화이다. 노래와 사랑과 애절함과 어두운 시대상으로 차 있다. 오늘의 내 마음이 자석처럼 끌렸던 영화이고,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다. 오늘만큼은 한 시라도 빨리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일하면서 자꾸 동료들끼리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그녀로부터도 벗어나고 싶었고, 사랑에 대한 거대한 갈망으로 인해 일렁이는 내 마음과, 오늘 아침의 강렬한 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아침에 살포시 눈이 떠진 건 오전 6시 반, 깨지 않고 잘 잤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은 기분에 조금 더 잠을 청해보다가, 한 시간 정도 더 잤던 것 같다. 꿈에서의 그 녀석은 계속 내 손을 잡고 깍지를 낀 채 이야기를 했다.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종내 키스를 했다. 그렇지만 그다음 순간 그는 사라져 버렸다. 오전에 아주 많이 강렬했던 그 느낌은, 하루가 지나면서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마치, 절대자께서 이건 현실이 아니라 너의 갈망이라고, 빨리 일어나라고 채근한 것처럼 바빴던 오전을 지나, 사람들의 검은 기운으로 조금은 절망적인 오후가 되고, 바깥에서 아무런 걱정이 없는 듯 떠드는 아이들의 소리에 약간 짜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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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아름다워 춤과 노래에 능한 그녀, Zuzanna - 수잔나와 그녀의 음악 선생님 Wicktor - 빅터. 폴란드의 민요를 공연하며 유럽의 전역을 도는 그들의 시기는 1940년 말부터 1960년대 초... 영화 제목처럼 연인들은 두 사람은 냉전을 거쳐가는 중이다. 소녀의 성장과, 사랑이라는 감정의 화염을 거쳐, 소멸, 그리고 사그라들지 않는 불꽃을...


빅터는 파리의 자유를 꿈꾸며 일찍이 망명하고 수잔나는 공연을 통해 그와 서로 다른 유럽의 도시에서 조우한다. 그들에게는 찰나의 사랑이 있을 뿐 안정된 사랑은 없다. 유고슬라비아의 극장, 공연 중 객석에서 그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관리 안 되는 그녀. 빅터는 그녀를 일컬어 늘 love of my life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몇 년의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겠다 싶었다. 마치 나처럼. 언제 어디서건 그 사람을 만나도 나는 여전히 사랑하던 그 순간의 나로 돌아가리라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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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연인들로 다시 만난 빅터와 수잔나. 수잔나는 연인과 함께하기 위해 타인과 결혼해 파리에 정착하고, 음반 제작자과 된 빅터와 음반을 취입하며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부서져 있는 것 같다. 1957년, 그들이 함께 바라보는 센 강변 - 조용한 연인들, 다소 과장된 연극 같은 대사도 좋다. 모든 흘러간 광경들과, 앞으로 올 나날들에 대한 감상은 모두 흑백의 광경 속에 묻혀 버린다. 수잔나는 말한다.


I love him and that's that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게 다야)


작위적이다.

사랑은.. 신기루인가? 착각인가.

주기만 하는 사랑은 아직도 내겐 너무 어려워서...

강박 속에 사랑하는 그도 그녀도 애처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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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la라는 이름으로 불어 노래로 음반을 취입한 그녀.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될 수 없던 빅터를 두고, 사랑을 해도 늘 슬펐던 그녀는, 스스로 슬픔 속으로 떠난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연주한다. 그가 연주하는 bar의 이름은 개기일식, 마치 몇 년의 간극을 두고 만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상황 같다. 1959년, 어렵게 떠난 폴란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빅터는, 꿈에서도 수잔나를 찾고 있었다. 더 이상 폴란드인이 아니었던 그가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방법은 망명자로서의 감옥행뿐이었다. 그는.. 사랑을 위해서 감옥으로 향하고, 수잔나는 그의 면회를 간다. 오랜 시간들을 지나온 이 연인의 한 마디는.. "what have we done (우리가 그동안 해 온 것은 무엇일까)?"라는 짧은 넋두리. 그리고 기다리겠다는 말 한마디. 나는 여기에서 영화가 끝날 줄 알았다.


둘만의 방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그녀의 마지막 대사가, 크게 와닿는다.


Now I am yours, ever and ever (나는 이제 영원히 당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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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을 거쳐, 몸도 마음도 많은 세월을 겪고, 어느 정도는 망가져서야 함께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모습. 어떻게 이런 연기를 했을까? 수잔나의 마지막 대사.



"Let us go to the other side - the view will be better there (우리 다른 쪽으로 가 봐요, 그쪽의 전망이 더 좋을 거예요)


지금 내게도 필요한 말 아닐까 싶어서. 내가 지금 생각하는 삶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다른 장면에서 바라보면 더 좋은 일들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고 감사하는 내가 되고 싶어서. 사랑이 아련해서.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일렁이는 채로 하루를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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