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남자가 있다. 고운 시선으로 조용히 책을 읽는다. 사람을 기다리는 듯 하지만 만나야 할 사람은 바로 앞에서 눈을 감고 있다. 문득 주변을 비추어보니 모든 사람들이 다 혼자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커피 한 잔을 두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공간 속에 수많은 시간이 떠다니는 듯하다.
첫 번째 이야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분주해 보이고, 모든 것이 재미없다 말하는 한 여인. 그녀에게 호텔에 들어오려는 노숙자의 이야기를 해 주는 남자. 그녀는 어느덧 그 이야기에 빠져든다. 이야기는 사실인 듯 하나 사실은 아닌 허구이지만, 그 안에 있는 공허함은 저릿하다.
두 번째 이야기 편집자와의 만남. 담배를 끊은 남자에게 인도네시아 산 담배를 권하는 그녀는 자신의 헤어진 남자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상실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화면이 너무 어두워 밤이라는 어둠에 갇힌 사람 둘을 보는 듯했다. 둘이 걷는 덕수궁 돌담길 같은 끝없이 이어진 길에서, 둘 사이를 뚫고 등장하는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이는 한 여인이 말한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가야 해'
'손을 잡아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상해 보였던 그녀가 가장 정상으로 사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어른은 참 어려운 존재다.
세 번째 이야기 사진사와의 우연한 만남. 청산가리를 품에 안고 다니는 이 사내에게는 유방암이 전이된 아픈 아내가 있다. 그녀의 간병에 지치고 괴로운 그는, 우연히 마주친 남자를 보며 희망을 이야기한다.
네 번째 이야기 바텐더와의 만남. 손님들의 이야기로 시를 쓰는 기억상실증 바텐더를 만난다. 그녀는 그에게 말을 시킨다. 위스키 병에 담을 만한 추억을 나누어달라 한다. 남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어나간다.
감독님은 아마도 이런 생각으로 영화를 만드시지 않았을까. 어떤 힘든 일에도 사람은 쉽게 희망을 버릴 수 없다는 사실. 사진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기적은 안 믿어요 하지만 기적이라는 게 있어요!라는 말에 얼마큼 동의해야 할지 생각해 봤다. 내가 여기까지 잘 버티고 더 긍정적으로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면 기적인 듯하다.
어둡고 무겁다 했는데 영화가 벌써 한 시간 이상 흘러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살며 겪는 모든 이야기들에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소설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아주아주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나의 마흔 번째 생일이기도 했고, 많은 축하들을 받으며 혼자서 충만했던 건, 그간의 내 삶과 이야기의 경계는 한 해 한 해 더 나이가 들 수록 점점 더 모호해져 가는 게 아닌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의 추억들도, 또 지금의 나날들도 나의 관점에 따라 부감 샷이 될 수도 클로즈업이 될 수도 있는 건 아닐는지. 내 삶은 내가 원하는 것만큼 시가 될 수도 소설이 될 수도 영화가 될 수도 있는 건 아닌지.
참으로 오랜만에 앞으로의 나날들이 기대된다.
영화 속 남자는 바텐더의 표현처럼 '기다린다는 말로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지구 건너편에 두고 온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마음을 고백하는 그 남자를 보며,
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지구 건너편에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안전하게 피신해 있었던 그 외로움에서 나와서. 희망이라는 걸 노래해 보고 싶어 졌다.
"바람을 따라가야지
손을 잡아야 길을 안 잃어"
그 말씀을 해 주신 건 그 남자의, 엄마였다.
한껏의 공허함과 쓸쓸함 뒤
희망을 노래하는 게 바로 인간.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산다.
추신 : 하루가 지나도 영화가 우린 곰국마냥 생각난다ㅡ 이 영화는 희망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였다ㅡ 그게 부끄럽기도 듣기 싫기도 거북하기도 했다. 상처는 왠지 어딘가 모르게 다 닮아있다. 신기한 사람들의 삶, 과 희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