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전적인 이야기로 흘러가고, 그러다 보면 나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 양 나도 모르게 포장하거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려고만 하거나 (현재를 바로 잡지 않으면 더 나은 미래는 없다!) 혹은 긍정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공감해 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불특정 다수가 보는 채널이라는 약간의 강박에 틀어박혀 미사여구로 내 인생을 꾸며내었던 건 아닌지, 그래서 '나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긴 긴 에세이를 쓰면서 정작 여기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했던 건 아닌지 싶다. 자성의 목소리가 결국 나비효과를 만들어 내 인생을 변화시켜 온 건 사실이지만, 자기 비난의 칼날들이 너무 투명하고 첨예해서 그것들이 늘 내 등에 날 서 있는 줄 몰랐다. 한 마디로, 너무 피곤한 삶이었던 것 같다. 아니, 진짜로 피곤하게 치열하게 살았다.
엊그제인가 멍하니 SNS를 보다가 알리바바 창업주 마윈이 이야기 한 각 연령대별로 취해야 할 기업가에 자세에 대한 글을 읽었다. 40대는 잘하는 걸 그냥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너무 늦었기에. 씁쓸하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행복 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면 열정 총량의 법칙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찾는데 너무 많은 열정을 소비했다. 친구 따라 강남에서 살았고, 남들이 하는 좋아 보이는 건 따라 했고, 종내에 그것들을 내 식으로 풀어내고 그 안에서 내가 왜 '그것들'에 열광해야 하는지를 찾기까지 참 열성적으로 살았다. 지나고 나보니 그 노력과 성취감, 피곤과 허무함의 경험들 빼고는 남는 게 없다. 사금을 해서 그 안의 아주 조금, 있는 진짜 반짝이는 나를 부여잡고 싶어서 지난해부터 부단히 글을 써보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게을렀다. 아니, 게으르다기보다는 무엇하나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일도, 운동도, 드라마/영화 보기도, 공부도, 사교활동도. 일에 두서가 있어야 하고 다 할 수 있는 체력이 안되면 우선순위라도 뒀어야 하는데. 여전히 누가 만나자고 하면 거절도 못하는 나를 발견하고 풀이 죽었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에 썸남이 있었다. 동갑이고 말이 잘 통했고 나는 그의 배경이 어떻든 별로 상관이 없었는데, 내 학벌에 자격지심을 가졌던 그는 회사 내의 내 친구와 몰래 사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회사에서 마음 주었던 동료 두 명이서 내게 쌀쌀맞게 대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웃던 친구가 내게만 유독 내가 입은 옷이든, 내가 점심으로 주문한 메뉴든, 싫은 티를 내는 걸 보고 나는 '왜 그러는 거지?'라는 생각보다는 '나도 저렇게 싫은 티 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게 아이러니였다. 맹목적으로 그 사람과 잘 되었으면 했던 내 마음을 나중에 돌아보니 과연, 나는 그 사람을 좋아했던 걸까? 아니면 그냥 남들 하는 것처럼 적당한 사람 만나서 평범하게 정착하고 살고 싶었던 걸까.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성을 모른 채 누군가와 항해를 하려고 하면, 침몰이 자명한데. 세상을 살면서 지금까지 참 못했던 말 한마디. '싫어요'
영어를 배우면서 좋았던 건 'no, I don't want'가 명확해서, 한국어보다 보다 자연스럽게 더 많이 쓰이는 표현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싫다는 말, 그거 진짜 내 모습 아니라는 말, 나는 사실 그렇게 착한 아이가 아니라는 말, 나도 하고 싶은 게 있다는 말. 참 많은 말들이 내 가슴속에 박혀 나를 찌르다가 새벽 너머로 사라지는 요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은 얼마나 더 해야 진짜 내 모습이 나올까. 내 페르소나가 견고하고 두꺼워서 그걸 파헤쳐 보겠다고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던 것 같은데 마음공부는 가면 갈수록 괴롭다. 그래도 자꾸 들여다보려고 한다. 자연스러운 내 모습으로 살지 않으면 갑갑해서 이제는 더 못 견딜 것 같으니까. 사람들 사이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내 표현을 자꾸 해야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훈련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게 참 결핍되어 있었나 보다. 내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덜 비난하면 어떻게 인생이 바뀌는지 적어보자. 그리고 지금은 마음을 비우고 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