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18 0일차
10주년을 기념하려는 목적이 우리 부부의 결혼을 축하하기 것만은 아니었다.
그냥 10년이라는 상징성에 맞추어 하와이에 다시 갈 수 있다는 게 주 목적일 것이다.
연애시절의 간절함과 신혼시절의 설렘은 이제는 살아오며 부딪히고 터져가며 배겨온 굳은살처럼 쓰라림조차 느낄 겨를 없이 의리로 무던하게 살아가는 흔한 부부가 되었다.
우리 부부에게 하와이는 지상 낙원 같은 섬으로 기억되고 있어 설렘으로 다달이 넣은 적금이 제법 모여 하와이 여행을 충당할 만큼이 되었다. 우리의 둘 사이에는 굳은살과 함께 두명의 아이가 생겼고 그 아이들이 커서 벌써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이 되었다.
이제는 둘이 아닌 넷이다 보니 늘어난 사람 수 처럼 선택할 옵션이 더 늘어나게 되었다.
가족의 추억을 만드는 여행도 좋지만 아이들을 위해 미국의 삶을 간접체험 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와이프가 미국 본토로 항로를 변경했다.
와이프가 불쑥 꺼낸 미국에 사시는 와이프 고모집에서 지내며 아이들을 한인교회에서 하는 섬머스쿨에 보내자고 했다.
아이들을 위한 미국에서의 섬머스쿨
늘 나의 의견을 물어보지만 이미 정답은 정해져 있다.
이럴때 현명한 대처법은 충분히 깊게 고민하는듯 하다가 와이프가 원하는 방향의 답변을 해주는 것이다.
답정너를 이기려 하면 싸움만 일으킬뿐이다.
솔찍히 그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다.
나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미국 본토에 대해서 와이프한테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7~8살 무렵 1년간 미국에서 살다왔던 경험이 본인에게는 너무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번 경험을 통해 그 추억도 공유하고 나도 섬머스쿨 끝자락에 미국에가서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미국에 갈 비행기표, 비자, 여행자 보험, 아이들의 섬머스쿨 등록 및 방과후 수업, 필요한 물품 등 많은것을 알아보고 준비하는데 내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움이 되지 않았다기보다 와이프가 알아서 하기를 바랬다.
예민해진 와이프 눈치를 살피다보니.. 준비과정이 마치 결혼식이 끝날때까지는 끝나지 않는 결혼준비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타고갈 비행기 표라도 알아보라는 잔소리에 알았다며 스스로 예약했던 비행기표가 일정이 잘못 되었다는건 비행전날 알림 메세지를 보고서야 알았다. 부랴부랴 수수료를 물어내고 다시 예약을 했다.
“에어프라이? 난 주문한적 없는데... 뭐지?“
다시 보니 메시지는 ‘에어프레마‘라는 신규 취항한 저가항공이었다. 그냥 스팸으로 무시하고 넘겨버렸다면 변경 수수료만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고 와이프의 따가운 눈초리와 잔소리는 그 차액만큼 비례해서 오래갈 것이었을 텐데...
다시 돌이켜 생객해 보아도 아찔하다.
결혼식 전 수많은 준비사항들을 체크하고 다시 점검 해도 뭐가 빠졌을까 불안해 했던 것처럼
아이들과 와이프 그리고 미국 생활에 도움을 주실 장인어른까지 포함해서 미국으로 가는길에 내가 큰 도움을 준게 없지만 공항에 도착해 입국 수속을 마쳤음에도 찝찝한 마음을 떨 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엄마의 아산병원 검진날과 출국 날짜가 겹쳤다.
부모님은 늘 두분이 알아서 할 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하시지만 그래도 자식의 동행에 든든함을 느끼시는 듯하다.
그래서 늘 부모님을 챙기는 나의 성향을 잘 아는 와이프는 적당히 눈치를 주었다.
다행이라 하기 그렇지만 요 며칠 장마로 인해 많이 내린 비로 비행기가 6시간 연착이 되었다.
그래서 엄마 병원 진료를 동행하고 수서역까지 모셔다 드릴 수 있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설렘과 걱정이 공존했다. 장인어른이 잘 도와주시지만 그래도 나 없이 애 둘을 데리고 직항도 아니고 캐나다를 경유해서 미국까지 긴 여정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고모들이 주문한 짐까지 챙겨서 가는 덕에 무거운 캐리어 조차 어찌 잘 간수할 수 있을까?
무던한 부부 사이 일지라도 늘 와이프의 안위는 걱정이 된다.
여행자 보험 덕분에 지연에 대한 보상으로 공항에서 마음것 만찬을 즐겼다.
꼼꼼히 준비한 와이프의 노력이 빛을 발휘 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미국 사절단은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애둘을 데리고 갈 걱정을 하면서도 설레는 기분이 와이프 얼굴에 드리웠고 끝까지 볼멘 소리를 하며 사라졌다.
처음으로 멀리 떨어진다는 생각에 먹먹했던 기분은 배웅을 마치고 불 꺼진 집으로 돌아오니 더 또렷해졌다.
다들 나의 자유를 궁굼해하며 언제부터 자유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 자유에 대해 큰 기대는 없었다.
생각보다 혼자 불 꺼진 집에 들어오는 기분은 먹먹하고 공허했다.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밖으로만 돌아다녔던 젊은 시절이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