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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r 17. 2021

25



     이 거대한 백색 무덤 앞에서 나는 그저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왕자는 나를 끌고 까마득히 높은 뼈 무더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온통 눈부신 하얀색이었다.


     “아름답지?”


    어린왕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숨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지평선이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인 거야?”


     한참 후에야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오십이억 칠천사십일만 삼천이백구십육 명.”


    어린왕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는 그만 머리가 멍해졌다.


    “세계 인구를 거의 다 죽인 거야?”


    나는 외쳤다.


    “거의 다?” 


    어린왕자가 웃었다. 나도 따라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 죽였어.”


    “뭐?”


    “모두 죽였다고. 이미 자살과 살인, 전쟁으로 세계 인구가 꽤나 줄어서 수고는 좀 덜었지만.”


    나는 농담인가 하고 어린왕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린왕자는 한 번도 농담을 한 적이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 나는…….”


    나는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어린왕자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네가 이 지구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야.”


    나는 별안간 침착해졌다. 더 이상 놀랄 것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 들었다.


    “왜 나는 죽이지 않았지?”


    내가 물었다. 어린왕자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장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서지.”


    어린왕자가 말했다.


    “소장의 소원?”


     “인류의 시체 더미 위에서 마지막 인간으로 자살하는 것.”


    “그게 나라는 거야?”


    “인간의 마무리는 역시 인간이 직접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널 해동시켰지.”


    “만약 내가 자살하지 않겠다면 어쩔 건데?”


    나는 입술을 씹으며 물었다.


    “나를 죽일 거야?”


    “뭐, 그것도 재미있겠지.”


    어린왕자는 마치 진짜 인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찡긋거렸다.


    “하지만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그러니 네 마음대로 해. 계속 살아가든지, 아니면 자살하든지.”

나는 뼈 무더기 위에 주저앉았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스스로 후회하지도 않았다.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앞에는 엄중한 선택의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내가 선택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나는 자유로웠고 이것은 온전하게 나 자신의 문제였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면 아름다움도 영영 사라지는 거야.’


     내 귓가에 어린왕자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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