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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r 22. 2021

26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멀리서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젯밤 뼈 무더기 위로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내 처지가 한꺼번에 떠올라 나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살아있는 한 매일 이렇게 잠에서 깰 때마다 충격을 받게 되겠지. 나는 떠오르는 태양을 보는 게 두려워졌다. 두더지처럼 뼈 무더기 아래로 끝없이 파고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빨간색’을 삭제한 것도 너겠구나.”


    별안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뼈 무더기 아래 푸르스름하고 짙은 그늘 밑에 어린왕자가 앉아있었다. 어린왕자는 내게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빨간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어린왕자는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건 지극히 인간적이고 언어적인 관점이야. 하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오직 인간의 언어로만 얘기할 수 있거든. ‘존재’란 것도 그저 언어의 여백에 불과할 뿐인데, 그것도 모자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떠들어대다니, 대체 그게 무슨 뜻이지?”


     어린왕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알아. 우습게도 인간에게는 부조리가 바로 의미라는 걸. 부조리하면 할수록 더 의미가 있다고 믿지. 그들은 언어를 똑바로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틈새를 벌리기 위해 언어를 만들었어.”


    어린왕자는 잠시 귀를 기울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 힘은 너무 강력해서 우리 같은 사물들까지 말려들고 말지.”


    그리고 어린왕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이야.  인간은 생명과 죽음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게 아니라 부조리와 사물 사이 어디쯤에 있는 거야. 그리고 언어가 각각 개인들의 위치를 결정하지.”


    어린왕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맞아. 그건 마치 거울 속에 비친 형상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면 어느 날 그 형상이 불쑥 대답을 하게 되는 것과 같아.”


    어린왕자의 눈이 붉게 빛났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대답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지.”


    “한가하게도 질문 자체에 중독되어 있거든.”


    “그들은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불러.”


    “그래, 그렇다니까.”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오늘 밤 자정이야.”


    어린왕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해가 떠올라 어린왕자와 나의 그림자가 하얀 뼈 무더기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 자정에 뭘 한다는 거야?”


    내가 물었다. 하지만 어린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와 얘기한 거야?”


    내가 다시 물었다.


    “프로그램.”


    어린왕자가 대답했다.


    “프로그램이라니? 무슨 프로그램?”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프로그램.” 


    “그건 연구소 중앙컴퓨터실에 있잖아.”


     “네가 자는 동안 중앙컴퓨터실에 가서 이 프로그램을 나에게로 옮겨왔어. 어차피 이 프로그램도 더 이상 할 일이 없거든. 말하자면 이 프로그램에게는 내가 마지막 과제인 셈이지.”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이 삭제 프로그램이 내 자폭 명령 코드를 완성해 줄 거야. 자신의 프로그램 삭제 코드와 같은 형식이라고 하더군.”


    나는 경악해서 외쳤다.


    “자살할 생각이야?”


    어린왕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뭐, 말하자면 그렇지.”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던지 간에 거기에는 늘 어린왕자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 죽으려는 거야?”


    “그래야 네가 정말 최후의 인간이 될 테니까.”


    “하지만 어차피 넌 인간도 아니잖아.”


    어린왕자는 아무 대답 없이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최후’가 되고 싶지 않아.”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제서야 ‘최후’라는 말의 엄연한 현실을 직시했다. 나는 이 영원한 우주에 철저하게 홀로 남겨질 것이다. 자유롭고 온전하게. 최후의 인간에게는 더 이상 ‘인간’이라는 말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최후’라는 말조차도 소용을 상실할 터였다. 아니, 언어 전체가 사물들 밑으로 가라앉고 말겠지. 그럼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


   “내가 죽는 모습을 네가 봐줬으면 좋겠어.”


    어린왕자가 말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에게는 그게 필요해.”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고 있다. 어린왕자가 살인기계라는 걸. 자신의 손으로 모든 인류를 죽였다는 걸. 나를 살려둔 것도 결코 동정이나 자비가 아니었다는 걸. 그러나 그는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날 밤,  우리는 가장 높은 뼈 무더기 위로 올라갔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 빛나고 있었다. 어린왕자는 그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넌 아직도 결정을 못했니?”


    어린왕자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린왕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이 말을 할까 말까 계속 망설였어.”


    망설이다니? 나는 놀랐다. 그건 어린왕자답지 않은 일이었다.

 

    “지엽적인 정보가 오히려 너를 더 혼란스럽게 해서 올바른 선택을 방해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너에게 사실을 숨기는 건 공정하지 않은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어.”


    도대체 여기서 더 혼란해질 일이 무엇인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넌 지금 임신 중이야.” 


    어린왕자가 말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천진한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는 어린왕자가 ‘임신’이라는 말의 뜻을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말도 안 돼.”


    나는 말했다. 


    “사실이야.”


    어린왕자가 말했다.


    “불가능한 일이야. 난 여기서 다른 사람을 본 적조차 없는데.”


    “아니, 가능한 일이야. 임신이 된 건 네가 냉동되기 전이니까.”


    아, 나는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짚이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건강해. 네가 궁금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아무 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어린왕자는 나에게 하얀색 물약이 들어있는 작은 유리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받아.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이걸 한 모금 마시면 아이는 유산될 거야. 그리고 이걸 모두 마시면 너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어.”


    나는 약병을 받아 들었다. 차갑고 딱딱한 촉감이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어린왕자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이를 낳지 마. 그건 ‘죽음’을 낳는 일이라는 걸 알잖아. ‘최후’를 그 아이에게 떠넘기는 것뿐이잖아. 또 하나의 부조리가 스스로 인간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셈이야? 그만둬. 겨우 마침내 끝장이 날 참인데 이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짓이야. 그저 너 홀로 완전하고 고독한 존재가 되어 아무런 간섭도 방해도 없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해.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말이야.”


    나는 어린왕자의 손을 잡았다. 어린왕자도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말이 없었다. 어린왕자는 자신의 목에 둘러져 있던 노란색 목도리를 내 목에 둘러주었다. 그리고 홀로 하얀 언덕들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며칠 뒤, 나는 지평선 끝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는 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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