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밤 (3)

by 곡도





세 사람은 어물어물 입을 다물더니 말없이 술잔을 기울인다. 전혀 다른 생각, 전혀 다른 감정, 전혀 다른 세계가 세 사람 주변에서 부산스럽게 부스럭거린다. 현정은 술을 쭉 들이켜고 어깨를 부르르 떤다. 누군가와 가까워질수록 더욱 멀어진다는 건 언제나 씁쓸한 일이다.

별안간 왁자한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주점 문을 벌컥 밀치며 들어온다. 긴 머리의 여자가 둘, 단발머리의 키 큰 여자 하나, 남자 같은 옷차림에 짧은 머리를 한 여자가 하나다. 그중 긴 머리를 밝은 갈색으로 물들이고 분홍색 머리띠를 한 여자가 수미를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든다. 수미도 손을 흔들어 화답한다.

“누군데?”

지영이 고개를 기웃거린다.

“유민이 동창인데, 저번에 같이 술 마시다가 친구 하기로 했거든. 나 잠깐 인사하고 올게.”

수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긴 머리카락을 흔든다. 순간 아카시아 꽃향기와 비슷한 향수 냄새가 현정의 코끝을 스친다. 현정은 숨을 들이켜 남은 향을 빨아들인다.

수미가 자리를 뜨자 두 사람은 거북한 침묵에 잠겨 든다. 현정이 애써 우스갯소리를 해보지만 소용없다. 마치 생일 케이크를 다 먹어치운 생일잔치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왕이 빠진 연회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설사 그 여왕이 잔인하더라도, 부당하더라도, 혹은 멍청하더라도, 그 아름다운 얼굴로 바라봐주고 있어야 춤추고, 싸우고, 노래할 맛이 난다.

“너, 너무 티 내지 마.”

불연 듯 현정이 지영에게 한마디 한다.

“뭐?”

“수미 말이야.”

“수미가 뭐?”

지영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하지만 곧 포기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은, 나 오늘 수미한테 고백할 거야.”

“어?”

현정은 깜짝 놀라 입에 물고 있던 땅콩을 그만 씹지도 않고 삼켜버린다.

“진짜야?”

“그래.”

“진짜, 진심이야?”

“어.”

“하지만.”

“하지만, 뭐?”

“괜찮겠어?”

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현정은 찬찬히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잇는다.

“잘 생각해 봐. 수미를 알잖아. 수미는 레즈비언이 아닌지도 몰라. 양성애자거나, 혹은 그냥 이성애자인지도 모르지. 쟨 남자들의 사랑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사랑마저 독차지하고 싶은 것뿐이야. 아니면 그저 소싯적의 짜릿한 경험이나 모험, 은밀히 간직할만한 비밀이 필요하거나.”

“나도 알고 있어.”

지영이 말끝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애써 씹어 삼키더니 말을 잇는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무슨 말이야? 처지라니?”

“너도 수미를 좋아하잖아?”

“뭐?”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현정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늘 하는 버릇처럼 히득거리며 웃는다.

“그렇긴 하지만, 네가 수미를 좋아하는 것과는 달라. 차라리 너보다는 내가 수미한테 어울린다고 할 수 있지.”

“어째서?”

“난 너처럼 진지하지 않거든.”

“진지하지 않다니, 무슨 뜻이야?”

“촌스럽지 않다는 뜻이지.”

“뭐라고?”

“말하자면, 나는 그냥 수미와 하룻밤 자고 싶다는 얘기야.”

지영은 번쩍이는 눈을 치켜뜬다. 그리고 현정의 뺨을 갈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모두 사랑을 깔본다. 사랑에 침을 뱉는다. 사랑을 촌스럽고, 아둔하고, 불필요하고, 심지어 거추장스럽다고 한다. 사랑은 알맹이가 아닌 껍질이거나, 최대한 좋게 봐주어야 그저 풍미를 돋우는 양념이라는 것이다. ‘양념이 지나치면 요리를 망치는 법이지’라는 듯 현정이 눈썹을 찡긋한다.

“난 너야말로 레즈가 아니라고 생각해.”

지영이 이를 악물며 곱씹듯이 쏘아붙인다.

“뭐?”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럼 내가 이성애자라는 거야? 이제까지 내가 잔 여자만 해도 한 트럭은 될 텐데.”

“넌 동성연애자야.”

“뭐라고?”

“동성애자가 아니라 동성연애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자레인지 속에서 강냉이가 터지듯 현정이 와르르 웃어재낀다. 지영은 당황스러워서 주변을 돌아보다가 황색 코트의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더욱 불쾌해진 그녀는 현정을 노려본다. 저 터져버린 입을 틀어막기 위해 탁자라도 세차게 내려칠 판이다. 현정은 겨우 웃음을 추스르며 손을 휘젓는다.

“그래, 그래. 네 말처럼 내가 동성연애자라고 치자.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야. 이성애자들이 이성애자와 이성연애자를 구분하는 거 봤어? 그런 자의적인 분류가 동성애의 임의성을 더 강조한다는 걸 모르겠니? 그렇게 까다롭게 분류해 나가다간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한 명씩 낱낱이 떨어져 나가서 결국 어떤 분류도 불가능해지고 말걸? 하긴 결국엔 그렇게 되고 말겠지만.”

“결국 그렇게 되다니, 무슨 얘기야?”

“사실 아까 수미가 했던 얘기가 아예 틀린 건 아니야. 동성애가 일종의 유행이라는 거 말이야. 모르겠어? 유행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는 걸. 앞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공식적으로 분류하거나 정의 내리기 위해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거야. ‘레즈비언’이란 단어도 점점 말랑해지다가 상징적인 슬로건이나 학문 용어가 돼버리겠지. 어쩌면 우리는 ‘이성애자’나 ‘동성애자’를 자처하는 마지막 세대인지도 몰라. 곧 새로운 용어들이 무수히 범람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것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게 될 거야.”

지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어쩌면 현정의 말이 모두 맞는지도 모른다. ‘레즈비언’이니 ‘동성애’니 ‘이성애’니 하는 개념들은 이미 한심하게 구태의연해져서 역사보다 똑똑한 개인들에게 곧 우스갯거리로 전락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영에게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레즈비언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이것이 그녀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것이다. 이것마저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녀는 영원히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지도 못할 것 같다. 여자로서가 아니라면, 레즈비언으로서가 아니라면, 사랑이 없다면,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벽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놓고 태양이라고 우긴다. 실상 태양은 그 동그라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말이다. 사랑마저 설사 그런 것이라 해도 지영은 더욱 반듯한 모양의 동그라미를 그리기 위해 벽에 매달릴 것이다.

“그래도…….”

지영은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간신히 입을 연다.

“난 오늘 수미한테 고백할 거야.”

현정은 빨갛게 달아오른 지영의 얼굴을 흘긋 바라본다. 어쨌거나 말해버리고 싶은 의지가 고집처럼 얼굴에 드러나 있다. 현정은 가볍게 콧바람을 내뿜는다. 그녀로서는 지영이 진심으로 수미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사랑을, 자신의 사랑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사랑을 지키려는 건지 헷갈린다.

어찌 되었든 셋이서 즐겁게 지내던 시절은 이제 끝장났다는 사실에 현정은 꾸덕꾸덕 입맛을 다신다. 함께 어울리기 시작한 건 1년 전으로, 그들은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다. 좋은 친구들이 생겼다는 사실에 내심 누구보다 기뻤던 건 현정이었다. 그녀에게는 사랑보다 우정이 더 필요했고, 또 소위 이 바닥에서는 소박한 우정이란 진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고 보니 애초에 이토록 다르기만 한 세 사람이 어떻게 친해질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하게 여겨졌다.

“알았어. 그럼 난 이쯤에서 자리를 피해 줄 테니까 잘해봐.”

“어딜 가려고?”

“나는 오늘 쟤하고 놀지, 뭐.”

현정은 황색 코트를 입은 절름발이 여자를 가리킨다.

“진짜야?”

“사실 아까부터 관심이 있던 참이었거든.”

가방을 챙기는 현정을 지영은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기, 미안해.”

“그럴 거 없어. 그리고 아까 내가 했던 얘기는 잊어버려. 너희 둘이 잘 되면 나도 좋지.”

현정은 자신이 마시던 맥주병을 들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온 세상 고민을 다 짊어진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지영을 뒤로하고 바 쪽으로 걸어간다. 황색 코트의 여자는 새파란 색의 칵테일을 최대한 천천히 홀짝이고 있다. 아까는 노란색 칵테일이었는데. 이미 몇 잔째인지 알 수 없다. 현정이 틈틈이 지켜본 바로는 그때까지 그녀에게 말을 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현정이 부드럽게 인사를 건넨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황색 코트의 여자는 소스라치며 현정을 돌아본다. 놀라는 표정이 좀 과장돼 있다. 어쩌면 현정이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정은 재빨리 황색 코트의 여자를 훑어본다. 여자는 결코 예쁜 얼굴은 아니다. 눈썹도 많지 않고 눈과 입술 선이 너무 가늘어서 희미하고 빈해 보이는 인상이다. 게다가 딱히 촌스러운 차림도 아닌데 어딘지 촌티가 난다. 아마 평소에는 이렇게 입지 않을 것이다.

“혼자 왔나 봐요?”

“네에.”

“나하고 얘기나 좀 할래요? 나도 지금 혼자라 심심한데.”

“하지만, 저기 친구들하고 같이 계셨잖아요.”

“아,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됐어요.”

황색 코트 여자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수미가 자리에 돌아와 있다. 수미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듯 현정에게 짓궂은 눈짓을 해 보인다. 현정은 싱겁게 웃어 보이고는 다시 황색 코트의 여자에게 고개를 돌린다.

“실은 저기 단발머리 친구가 분홍색 원피스 입은 친구한테 고백할 거거든요. 그래서 제가 자리를 피해준거에요.”

“아, 그래요?”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수미와 지영을 쳐다본다.

“저기, 저분은 굉장히 미인이시네요.”

“수미요? 네, 예쁘게 생겼죠? 그쪽도 저런 타입 좋아해요?”

“저요? 아뇨, 저는, 글쎄요.”

황색 코트의 여자는 당황했는지 어쩔 줄을 모른다.

“괜찮아요. 모두들 그러니까.”

현정은 소리 내어 자조적으로 웃는다. 그리고 김이 빠진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수미와 지영 쪽을 바라본다. 슬슬 심각한 얘기가 오가는 눈치다. 하지만 현정은 이미 저 대화의 결말을 알고 있다. 물론 예외의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사람의 마음처럼 즉흥적이고 간사한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현정은 혀를 차고 말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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