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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Feb 16. 2023

구멍 (아홉)





아홉...          




     윤주를 버스에 태워 보낸 석준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아직도 간판과 네온사인들이 머리 위에서 번쩍거렸고 흥청망청한 음악 소리가 골목마다 넘쳐흘렀다. 서울의 밤거리는 1년 내내 매일매일이 크리스마스이브 같다고 석준은 생각했다. 치렁치렁한 과장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고 또 무언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숨길 필요도 없는 설레는 밤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크리스마스가 오지 않는 크리스마스이브 같아서 냉담한 무력감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길거리에 즐비하게 흩어져 있는 쓰레기와 오물을 밟지 않으려고 애쓰며 석준은 부지런히 전철역으로 향했다. 막차 시간이 채 30분도 남지 않은 전철역 입구는 서둘러 전철을 타려는 사람들과 지금 막 전철역을 빠져나오는 사람들로 상당히 번잡했다. 그래도 승강장은 한가하겠거니 생각하며 서둘러 전철역 안으로 들어선 석준은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인데도 승강장은 꽉 들어찬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마치 출퇴근 시간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거기다가 시원찮은 에어컨과 사람들의 땀내 나는 열기 탓에 공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혼탁했다.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어깨 너머로 들어보니 벌써 30분이 넘도록 전철이 오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러다가 전철이 끊기는 건 아닌지 모두들 안절부절이었다. 석준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는데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현재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하여 원활한 전철 운행에 차질을 빚고 있습니다. 깊이 사과드리며 20분 안에 전철이 정상 운행될 것이오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마감 시간 이후에도 연장 운행해서 승객 여러분들께 더 이상의 불편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철이 지연된 이유를 석준은 다음 날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두 정거장 전에서 한 40대 남자가 달려오는 전철에 뛰어들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안내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승강장에 있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중에 달린 스피커를 향해 아우성을 쳤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택시나 버스를 이용하기 위해 서둘러 층계를 뛰어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운이 빠진 석준은 전철이 올 때까지 어디 앉을 만한 곳이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남아도는 자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드문드문 놓여있는 4인용 플라스틱 의자들은 비좁게 끼어 앉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심지어 층계며 가판대 같이 앉을 수 있는 곳이란 곳은 모두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는 결국 커피 자판기에 바짝 붙어 서서 꾸부정하게 몸을 기댈 수밖에 없었다. 

     자판기에서는 커피 찌꺼기 냄새가 유난히 역겹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손바닥으로 자신의 배를 눌러 보았다. 2주 전 얼핏 지나가는 말로 나누었던 걸 약속이라고 윤주가 우기는 바람에 먹게 된 삼계탕이 소화가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헛 트림과 함께 그의 입에서는 씁쓸한 인삼 냄새와 마늘냄새가 풍겨 나왔다. 연신 고이는 침을 삼키고 있자니 석준의 가방 속에서 문자가 왔다는 핸드폰 신호음이 울렸다. 보나마나 윤주일 게 뻔했다. 집에 도착하면 문자를 보내라고 아까 헤어질 때 일러두었던 것이다. 딱히 윤주가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물론 늦은 밤길에 그녀를 혼자 들여보내는 게 맘에 걸리긴 했지만, 그보다는 윤주가 도서실에서 공부하는 걸로 알고 있는 윤주의 부모님에게 행여 들통이 나지 않았는지 확인해두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친구들과 놀러 나갔던 걸로 하겠다고 윤주가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말이다. 

     이런 단편적인 사실만 비추어보면 윤주가 석준을 위해 여러 가지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만도 했다. 하지만 실상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이것은 윤주에게 훨씬 더 유리한 게임이었다. 말하자면 크게 잃을 것이 없으니 윤주는 저렇듯 겸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순종 역시 그 나이 또래의 거칠 것 없는 자신감의 표현일 뿐이었다. 반면 석준은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차후에 자신의 족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윤주와의 사소한 대화마저도 조심스러웠다. 사실 그동안 그는 꽤 잘 처신해 온 편이었다. 딱히 트집잡힐 만한 일도 없었고 윤주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이 윤주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걸 석준은 최근 들어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그녀에게 큰소리를 쳐보아도 어째서인지 자꾸 의기소침해 져서, 심지어 ‘싫다’라고 단호하게 말할 때조차 이 어린 여자아이에게 굽실대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머지않아 석준은 윤주와의 관계를 연애 관계로 발전시키거나 혹은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함으로써 주도권을 되찾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간에 일이 번거롭고 치사스럽게 되었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석준은 반복해서 문자 수신 신호를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선생님, 저 집에왔어요 선생님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힘내시구요 사랑해요]

     석준의 입에서 헛바람 같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대체 무엇을 힘내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소꿉장난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한편 그녀의 막연한 다정함에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착한 아이다, 라고 석준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어찌되었건 착한 아이야.’ 

     두 눈 딱 감고 윤주가 하자는 대로 모두 따라주고 싶은 생각이, 평생 이 아이를 곁에서 아껴주고 또 지켜주고 싶은 대책 없는 생각이 그의 가슴 속에서 울컥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재채기가 그렇듯 그런 기분은 미처 손을 뻗치기도 전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려서 석준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째서 사람은 원하지도 않는 것을 굳이 떠올려 곱씹게 되는 걸까. 그는 윤주에게서 온 문자를 다시 한 번 읽은 후 삭제해 버리고는 핸드폰을 도로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마침내 전철의 도착을 알리는 예고 종소리가 승강장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안도와 불만을 동시에 쏟아내며 앞쪽으로 몰려들었다. 석준도 커피 자판기에서 몸을 일으켜 될 수 있는 한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환하게 불을 밝힌 전철이 쇠 긁는 소리와 함께 승강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달구어진 쇠붙이 냄새와 하수구 냄새가 바람을 타고 사람들 사이로 휘몰아쳤다. 석준은 앞에 서있는 여자의 긴 생머리가 사방으로 흩날리는 것을 잠깐 동안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미 고전이라고 할 만큼 진부한 장면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머리카락이 꽤나 멋들어지게 날렸기 때문에 꽤 괜찮은 광고사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광고사진작가가 되었다면 꽤나 성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건 완전히 터무니없는 공상만은 아니었다. 대학교 시절 그의 사진을 본 사진과 교수가 광고사진 쪽으로 진로를 정해보면 어떻겠냐고 권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그 칭찬을 그 때는 왜 그렇게 쉽게 흘려보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때 생각을 다잡고 광고사진작가가 되었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멋진 삶이었을까? 아니면 지금과 별다를 것 없이 그저 그렇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또 그저 그렇고 그런 바램들을 포기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전철 문이 열리자마자 우루루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붙어 그도 낑낑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전철 안도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있어서 겨우 비집고 서 있을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운 좋게도 석준은 다음 정거장에서 재빨리 자리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남자는 사람들이 코앞까지 북적이는 상황에서도 용케 신문을 펴서 읽고 있었다. 석준은 팔짱을 끼고 옆 사람의 신문을 슬쩍 넘겨다보았다. [J양 비디오, 드디어 실체가 밝혀지다]라는 제목이 붉은색으로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이런 종류의 글들은 읽은 만한 가치라곤 조금도 없지만 그러기에 더욱 읽을 맛이 나기 마련이었다. 작은 글씨를 보기 위해 석준이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남자는 짧은 헛기침과 함께 신문지를 바짝 치켜세웠다. 무안해진 석준은 슬쩍 자신의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챙이 짧은 노란색 모자를 쓴 중년의 여자가 이어폰으로 무언가를 듣고 있었다. 짐짓 귀를 기울여봤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석준은 팔짱을 단단히 가슴 위로 끌어당기며 눈을 감아버렸다. 

     한참 뒤에 (어쩌면 잠시 졸았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두개의 환승역을 지나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전철 안은 한산해져 있었다. 서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데군데 빈 좌석도 보였다.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언제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왼편에 앉아있던 노란 모자의 여자도 어느새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옆 사람이 자리를 뜨는 것도 모를 정도였으니 그는 정말 졸았던 모양이다. 석준은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뒤로 젖히며 몸을 쭉 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이미 새벽 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석준은 뒤쪽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이 늦은 시간이라 반 정도의 사람들은 졸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두엇씩 짝지어 시시덕거리거나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어쩐지 평온한 광경이서 그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게다가 전철 특유의 낮고도 부드러운 소음이 석준의 마음을 더욱 느긋하게 해주었다. 그는 전철이 흔들릴 때마다 함께 비틀거리는 승객들을 한명한명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렇게 함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야릇하게 느껴졌다. 아니,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해도 한 다리 혹은 두 다리 건너가 보면 의외로 아주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었다. 동료 강사의 누나,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의 아버지, 자주 가는 식당 주인아주머니의 조카, 초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의 고등학교 동창, 예전 첫사랑의 남편 등등. 혹은 반대로 지금은 이렇게 스쳐지나가지만 훗날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까 옆에 앉아있던 노란 모자를 쓴 중년의 여자와도 미래의 어느 날 중요한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 때가 되면 전철 안에서 서로 팔을 맞대고 나란히 앉아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고서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게 될 것이다. 

     엇갈리고 가로지르는 인간사를 이리저리 더듬어보던 석준은 퍼뜩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지금 이 중에 ‘죽은게이의사회’가 있는 게 아닐까? 무심코 던진 농담에 그만 스스로 등골이 서늘해진 석준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새삼스럽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설사 ‘죽은게이의사회’가 정말 이곳에 있다 해도 얼굴도, 목소리도, 하다못해 옷 입는 스타일마저 모르는 사람을 이 많은 사람들 틈에서 찾아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반년이 넘도록 거의 매일 대화를 나누다시피 했으니 어쩌면 직감적으로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석준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청년은 핸드폰으로 쉴 새 없이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무언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하는지 가끔 혼자서 히죽거렸는데, 솔직하고 시원하게 올라간 입 매무새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감을 느끼게 했다. 거기다 밝은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와 오른쪽 귀에 박힌 링 귀걸이, 가죽 끈 팔찌 같은 액세서리들이 제법 멋스러워 보였다. 사실 그동안 석준은 귀걸이 하는 남자들을 탐탁지 않게 여겨왔다. 한쪽 귀에만 착용한 귀걸이는 더욱 그랬다. 그 의도적인 비대칭이 비위에 거슬렸고, 그저 외국에서 건너온 천박한 유행을 대변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석준은 그런 것들이 그리 미워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이 청년처럼 잘 어울린다면 아무 불만이 없었다. 거기에는 한 발을 다른 곳에 슬쩍 걸쳐놓은 것 같은 유연함이 있었고, 선량과 불량 사이에서 마음만 먹으면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죽은게이의사회’는 어쩌면 저런 남자일까. (사실 석준이 마음속에 어림잡고 있는 ‘죽은게이의사회’는 이 갈색머리 청년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러나 어쩌면 ‘죽은게이의사회’는 아까부터 얼굴을 파묻고 신문 기사를 읽어 내려가고 있는 오른편 남자와 비슷한지도 몰랐다. 회색 면바지에 검은색 체크무늬 남방 차림인 남자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만큼 뻣뻣한 얼굴이었다. 165센티미터를 넘지 않을 것 같은 자그마한 체구에 눌러 쓴 밤색 야구 모자 아래로 짧게 깍은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있었다. 눈이 나쁜 건지 아니면 버릇인지 신문지에 바싹 얼굴을 붙이고 있었는데 미간까지 잔뜩 찡그리고 있어서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신문 기사 내용이 궁금해지게 만들었다. 혹시 ‘죽은게이의사회’는 이런 모습일까? 

     아니, 어쩌면 술에 취해 거친 숨소리를 헐떡이며 손잡이에 기대어 자고 있는 저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가 ‘죽은게이의사회’일지 누가 알겠는가? 저 남자처럼 깊게 패인 입가의 주름과 불룩한 배를 가지고 있고 머리숱이 눈에 띄게 줄어서 고민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아침이면 멀끔하게 넥타이와 양복 차림으로 출근했다가 퇴근 후에는 자신의 조그만 서재에 틀어박혀 밤이 새도록 채팅을 하는 부류의 남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들의 신상을 자신의 것처럼 가장해서 얘기하다 보면, 가끔은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자칫 혼동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정말 어쩌면 - 그는 비린 날생선을 한 조각 입 안에 넣었을 때처럼 콧잔등을 찌푸렸다. - ‘죽은게이의사회’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지금 막 전철 안으로 들어선 한 젊은 여자의 머리에 꽂혀있는 커다란 리본 핀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죽은게이의사회’가 여자일 수 있다는 가정은 황당무계한 상상만은 아니었다. 남자가 여자인척, 여자가 남자인척 채팅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게이 채팅방도 예외가 아니어서 호기심 많은 여자들이 게이 행세를 하며 들어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대부분은 그저 한두 번 엿보는 정도로 만족하기 마련이었지만 그 중 몇 몇은 시치미를 때고 몇 달 동안이나 함께 채팅을 하기도 했다.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동성애에 대한 지식도 상당해서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석준이 정작 참을 수 없는 건 그녀들의 부정직함이 아니라 오히려 정직함이었다. 돌연 맥없이 자신들이 여자라는 사실을 자백해 버리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게 그녀들의 핑계였지만, 그가 보기에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실제로 누구인지 떠벌리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것뿐이었다. 그동안 누가 진짜 이야기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는지 만천하에 폭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죽은게이의사회’가 정말로 여자라면 어떻게 될까. 혹은 중년의 남자라거나, 열 몇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라면? 그동안 ‘죽은게이의사회’와 나누었던 모든 대화들은 그 최소한의 의미마저 깡그리 사라져버리고 마는 걸까. 석준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자근자근 씹다가 곧이어 터지는 실소를 감추기 위해 또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떠올랐던 것이다. 자신이야 말로 벌써 6개월째 거짓 게이 행세를 하며 채팅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20대가 아닌 30대에, 게이가 아닌 이성애자 이혼남이라는 사실을 ‘죽은게이의사회’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동안 그들이 나누었던 모든 대화들은 그 최소한의 의미마저 깡그리 사라져버리고 마는 걸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석준은 재빨리 전철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층계를 올라갔다.        


   

죽은게이의사회▶ 넌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야?

MSG▶ 친구글쎄... 

죽은게이의사회▶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해서 벌써 딸이 있다던 친구는?

MSG▶ 고등학교때는 꽤 친했지

MSG▶ 근데 결혼하고 나니까 예전 같지 않더라고 

죽은게이의사회▶ 그럼 그 군대 후배라는 놈은 어때

죽은게이의사회▶ 군대에서 내내 야리꾸리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죽은게이의사회▶ 지금까지 연락해 온다며?

MSG▶ 그냥 가끔 만나

죽은게이의사회▶ 만나면 뭘하는데?

MSG▶ 별로... 그냥 얘기나 하는 거지

MSG▶ 이런 저런 쓸데없는 얘기들

죽은게이의사회▶ 우리도 만날까?

MSG▶ 

죽은게이의사회▶ 그냥

죽은게이의사회▶ 심심할 때 만나면 좋잖아^^

죽은게이의사회▶ 이런 저런 쓸데없는 얘기도 좀 하고...

MSG▶ 됐어 

MSG▶ 난 이거면 충분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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