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수업이 취소되는 바람에 저녁 7시쯤 일찌감치 집에 돌아온 석준은 먹을 걸 찾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하지만 한 눈에도 휑하니 비어있는 냉장고에는 먹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김치쪼가리 하나, 달걀 한 개도 없었다. 우유팩 2개와 맥주캔 몇 개, 말라비틀어진 귤이 한 개 있을 뿐이었다. 원한다면 냉장고를 책꽂이로 써도 될 만큼 깨끗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하루 두 끼 식사 모두를 외식으로 해결하고 있었고, 심지어 집에서 머무는 일요일에도 밖에 나가 끼니를 때우곤 했다. 냉장고가 아예 없다 해도 그는 별로 곤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집에서 음식을 해먹은 게 언제인지 석준도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요리를 등한시 했던 건 아니었다. 2년 전 처음 이 오피스텔에 이사 왔을 때만 해도 그 역시 곧잘 요리를 하곤 했다. 그 때는 혼자서도 잘 살아 보겠다는 의욕과 오기가 넘치던 때라 요리책까지 사서 보며 열심이었다. 그랬던 그가 점차 밖에서 끼니를 때우게 된 건 요리가 싫어서가 아니라 요리 후의 뒤처리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설거지에, 음식 찌꺼기에, 가스레인지의 기름때 하며, 싱크대 청소, 냄새나는 행주 같은 것들이 그를 진저리치게 했다. 굳이 이 구질구질함을 참아야 할 필요가 무엇인가 싶었다. 식당에서는 단돈 만원이면 맛있는 밥을 편하게 먹을 수 있는데다가, 음식 찌꺼기로 지저분한 식탁을 떳떳이 버려두고 나올 수 있는데 말이다.
그는 냉장고를 닫으려다가 냉장고 문에 달린 선반 한쪽 구석에 놓인 큼직한 유리병에 시선이 멈췄다. 노란 유자차가 가득 들어 있는 그 병은 아직 뚜껑조차 따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머그컵에 유자차 네 숟가락을 듬뿍 덜고 전기 주전자로 물을 끓여 넣었다. 순간 달큼하면서도 쌉쌀한 유자 향기가 뜨거운 김과 함께 사방으로 피어올랐다.
어느새 창밖은 완연히 어두워져 있었다. 석준은 머그컵을 들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늘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다가 초저녁에 집에 있으려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단 맛 때문에 속이 메스꺼우면서도 유자차 한 잔을 더 끓여 마시고는 불쑥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오랫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책들 위에는 먼지가 뿌옇게 덮여 있었다. 아마 오피스텔에 이사 올 때 정리 한 후 단 한권도 펼쳐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사실 석준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는 강의를 위한 참고 서적 외에는 제대로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매일 배달 오는 신문만 해도 반도 다 읽지 못한 채 던져버리기 일수였다. 그나마도 인터넷에서 손쉽게 뉴스를 읽을 수 있으니 그만 신문 구독을 끊어버릴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투덜대는 건 정말이지 거짓말이나 변명만은 아니라고 석준은 생각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도무지 종이에 쓰인 글들의 나열에 정신을 집중할 여유가 없었다. 일 할 때도, 밥 먹을 때도, 쉴 때도, 컴퓨터를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모두들 정말로 바빴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한다는 말도 이미 옛말이었고 이제는 모든 게 초 단위로 계산되고 있었다. 1초마다 한 명씩 아이들이 태어나고, 5초마다 한 명씩 아이들이 굶어 죽고, 40초마다 한명씩 사람들이 자살하고, 3초 사이에 주가가 10% 떨어지고, 컴퓨터 다운로드 속도는 초당 8mbyte…… 말하자면 1초에 30만km를 가는 빛이 속도의 기준이 된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일상도 음파 그래프가 그렇듯 초 단위로 잘게 구분 짓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바쁘게 살아갈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그건 순전히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린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삶이 마치 숫자가 적혀있지 않은 시계를 한 손에 들고 종종거리는 토끼처럼 보일 테지만, 요즘 사람이라면 시간보다 더 빨리 살아나가야 하는 조급함과 보챔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장을 살펴보던 그는 가장 아래쪽 선반 구석에서 프랑스 여행안내 서적을 찾아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종훈과 프랑스 파리로 배낭여행을 가면서 샀던 책이었다. 그 때 찍었던 사진들도 어딘가에 상자로 하나 가득 남아있을 것이다. 마치 전혀 없었던 일인 것처럼 그 시절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석준은 책을 펼쳐 들었다. 자신이 방문했던 에펠탑, 마르세유, 베르사유 궁전,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센터 같은 이름들이 나오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그 때의 기억이 참으로 묘연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어리둥절했다. 여행 일정이며 몇 몇 사건들은 글로 써내려갈 수 있을 만큼 기억이 또렷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딱 글로만 적을 수 있는 종류의 기억이 되어 있었다. 아니, 기억이라기보다는 기록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심지어 즐겁다고 느꼈던 감상마저 이미 ‘즐거웠다’는 문장으로 굳어진지 오래였다. 돌이켜보면 그 여행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기억이 다 마찬가지였다. 예전 일을 되살려 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라고는 진부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법도 맞지 않는 몇 줄의 문장들과, 그 문장들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흐릿한 흑백사진 몇 장뿐이었다.
그는 책을 옆으로 밀쳐놓고 그대로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방 천정이 이토록 낮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그의 이마를 짓눌렀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슬쩍 컴퓨터를 쳐다보았다. 궁금한 마음이 스물스물 그의 가슴께를 간질였다. 그는 모른 척 다시 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만큼은 절대 채팅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스스로도 지나치게 채팅에 빠져있다고 느끼던 차에, 그저께는 ‘돈벌레’라는 닉네임에게서 [채팅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느냐]라는 말까지 들었던 것이다.
왜 자신이 채팅에 골몰하는지는 석준에게도 분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채팅하는 중에 지루하고 한심했던 적이 더 많았는데도 어째서 결국 채팅을 하러 달려가게 되는 걸까. 그 안에서 하는 짓이라고는 고작 뻔하고 시시한 잡담뿐인데 말이다. 시시껄렁한 농담들과 음담패설과 함부로 던져지는 질퍽하고 명랑한 추파들이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전부였다. 진지하게 얘기할 법한 것들도 여기서는 그저 경박하게 지껄여졌다. 사랑한다고 잡담하고, 증오한다고 잡담하고, 아프다고 잡담하고, 슬프다고 잡담하고, 외롭다고 잡담하고, 죽고 싶다고 잡담했다. 그러나 사실 죽음 따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전에 가끔 채팅방에 들어오던 ‘물에물탄듯’이라는 닉네임이 별안간 [저 오늘 자살합니다.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버렸을 때도 모두들 시큰둥하기만 했다. 그건 진위를 알 수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누구도 진위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채팅하는 이들에게 채팅 밖의 세상이란 뿌옇고 어두운 미래와 같아서 그것이 죽음이 됐든 삶이 됐든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들’이 하는 얘기의 반 이상이, 아니 어쩌면 대부분이 거짓말이라는 걸 석준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상관없었다. ‘그들’을 믿으려고 애쓸 필요도, 굳이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상대방이 그렇다고 하면 그걸로 충분했고 그런가 보다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이것은 진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해 보이느냐 진실해 보이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상대방을 완전히 속인다면 그것은 무죄였다. 오히려 어설프게 속이려다가 들통 나는 것, 혹은 제풀에 실토해 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 부끄러운 일이었다. 서로에게 정직해야 한다는 강박만 버리고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자유롭고 관대해 지는가. 방어할 필요가 없다는 건 참으로 홀가분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방심은 이미 합의되어 있었다. 상대방을 속이는 건 나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그들’은 모두 지독한 거짓말쟁이들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 모든 걸 그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죽은게이의사회’였다. ‘죽은게이의사회’를 따라 잡기 위해 석준은 여기까지 무던히도 애를 써왔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이것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는 것 또한 ‘죽은게이의사회’였다.
죽은게이의사회▶ 우리가 여기서 만난지 반년이 넘었어
죽은게이의사회▶ 반년이면 짧은 시간이 아니잖아
죽은게이의사회▶ 그런데 맨날 그타령이 그 타령이고
죽은게이의사회▶ 이제 나는 허깨비같은 얘기들이 지긋지긋해
죽은게이의사회▶ 우리 만나자
MSG▶ 또 그 얘기야?
MSG▶ 만나서 뭐하게
죽은게이의사회▶ 얘기도 하고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죽은게이의사회▶ 섹스도 하고
죽은게이의사회▶ 사실 나 너하고 채팅 하다가
죽은게이의사회▶ 자위한적 많아
죽은게이의사회▶ 너도 내 생각하면서 자위한 적 있을 걸?
죽은게이의사회▶ 솔직히 말해봐
죽은게이의사회▶ 너도 나 만나고 싶지?
석준은 처음에는 좀 역겨웠고, 그 다음에는 감탄스러웠고, 그 다음에는 가소로웠다. 그에게는 ‘죽은게이의사회’가 말하는 ‘나’라는 주어는 물론이고 ‘너’라는 목적어마저 불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준 역시 조금씩 헷갈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죽은게이의사회’를 만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만나지 못하는 건지 더 이상 구별할 수가 없었다. 만약 처음부터 자기 자신에 대해 ‘죽은게이의사회’에게 솔직했다면 석준은 ‘죽은게이의사회’를 만나러 나갔을까?
그는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채팅 사이트로 들어갔다. 하지만 [패륜의 상대성 이론] 채팅방에서 ‘죽은게이의사회’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턱을 괴고 앉아 여러 닉네임들이 채팅방을 들락날락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몇 시간이 흘러 새벽 2시가 될 때까지도 ‘죽은게이의사회’는 나타나지 않았다. 채팅방에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떠나버리고 ‘EXIT’과 ‘길거나혹은굵거나’ 두 닉네임만 남아있었다. 이제 이 사람들까지 나가게 되면 이 방은 텅 비고 말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석준은 ‘야광콘돔’이라는 닉네임으로 채팅방에 접속했다.
*** [야광콘돔]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거나혹은굵거나▶ 하이~^^
야광콘돔▶ 안녕하세요^^
길거나혹은굵거나▶ 휴, 이제야 사람이 들어왔네
길거나혹은굵거나▶ 계속 혼자 있었거든요
야광콘돔▶ EXIT 님이 계시잖아요
길거나혹은굵거나▶ 계속 말을 걸었는데 한마디도 안해요.;;
야광콘돔▶ 저 분은 늘 그래요.
야광콘돔▶ 사람이 아니라 프로그램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에요ㅎ
길거나혹은굵거나▶ 그래요? 그럼 저 사람은 여기 뭐하러 오는 거죠??
야광콘돔▶ 글쎄요....
야광콘돔▶ 그러는 님은 여기에 왜 오셨는데요?
길거나혹은굵거나▶ 재밌잖아요^^
길거나혹은굵거나▶ 이렇게 실시간 글자로 얘기를 나눈다는 게...
길거나혹은굵거나▶ 글자들이 꼭 살아있는 것 같고ㅎㅎ
야광콘돔▶ 어쩌면 정말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야광콘돔▶ 글자들끼리 채팅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죠...
길거나혹은굵거나▶ 그러는 콘돔님은 왜 채팅 하는데요?
야광콘돔▶ 저요? 글세요....
야광콘돔▶ 설명하긴 어려운데
야광콘돔▶ 턱에 막 수염이 나왔을 때 손끝으로 만져보면
야광콘돔▶ 까끌까끌하고 근지러운 느낌 있잖아요
야광콘돔▶ 채팅이 그거랑 비슷한 것 같아요
길거나혹은굵거나▶ ㅎㅎ 알 듯 모를 듯 하군요
야광콘돔▶ 근데 닉네임 한번 걸하십니다~~
야광콘돔▶ 길다는 겁니까, 굵다는 겁니까
길거나혹은굵거나▶ ㅋㅋㅋ 직접 확인해 보실래요?
야광콘돔▶ ㅎㅎㅎ 겁나는데요
야광콘돔▶ 사진이라도 올려 주시려구요?
길거나혹은굵거나▶ 아뇨, 진짜 확인시켜 드릴려구요
길거나혹은굵거나▶ 내일 일요일인데 뭐하세요?
야광콘돔▶ 내일요?
길거나혹은굵거나▶ 내일 밤에 저하고 만날래요?
길거나혹은굵거나▶ 술 한잔 하고 하룻밤 어때요?
야광콘돔▶ 얘기 나누는 게 재밌어서 채팅 하신다더니....;;;;
길거나혹은굵거나▶ 에이 중학생들도 아니고
길거나혹은굵거나▶ 그냥 얘기만 할거면 뭐하러 이러고 있겠어요
길거나혹은굵거나▶ 시간 낭비지
길거나혹은굵거나▶ 왜요? 싫어요??
야광콘돔▶ 글쎄요
야광콘돔▶ 그럴까요?
길거나혹은굵거나▶ 그럼 내일 저녁 8시에 홍대에서 만나요^^
길거나혹은굵거나▶ 홍대에 있는 맨투맨 아시죠?
야광콘돔▶ 예
길거나혹은굵거나▶ 그 앞에 서있기는 좀 그러니까
길거나혹은굵거나▶ 그 옆에 토스트 가게가 있거든요
길거나혹은굵거나▶ 그 앞에서 제가 검은 코트 입고 서있을께요.
야광콘돔▶ 네
길거나혹은굵거나▶ 약속한겁니다? 그럼 내일 보죠~^^
** [길거나혹은굵거나]님이 퇴실하셨습니다
석준은 그제야 깜짝 놀라 의자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두 손을 맞잡고 부산하게 온 방안을 돌아다녔다. 마치 자신이 왜 그런 약속을 했는지 납득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보아도 적당한 설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세상에 원인 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지만, 영문도 알 수 없고 멈출 수도 없는 그런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이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자신에게 온전한 선택권이 있었는지 의심되는 순간 말이다. 석준은 순식간에 자신만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자신만 빼고 온 세상이 천정에 거꾸로 매달린 것 같았다. 그는 방 한가운데 우뚝 멈추어 섰다. 자신이 뛰어 내릴까 말까 결정하기도 전에 단순히 현기증으로 인해 추락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