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준은 비틀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계단 턱에 걸려 넘어질 뻔한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서 더 민망한 것 같았다. 그는 멀쩡한 옷을 툭툭 털어 바로 잡으며 서둘러 전철역 출구를 빠져 나왔다.
일요일 저녁의 홍대입구역 주변은 젊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거기다가 자질구레한 액세서리며 구두, 분식을 파는 노점상들로 꽉 들어찬 거리는 혼잡했다. 석준은 프린트로 뽑아온 ‘맨투맨’ 약도를 손에 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약도에 따르면 홍대입구역 4번 출구 앞에 있는 ‘해피 데이’ 편의점 옆 골목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돼있었지만 도무지 그 골목이 보이지 않았다. 목을 길게 빼고 둘러보던 그는 약도와는 조금 다른 위치에서 (편의점 이름도 ‘해피 데이’가 아니라 ‘해피 타임’이었다.) 겨우 그 골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가파른 언덕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약속시간에 딱 맞춰 도착하는 것도 공교로운 일이라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렇지만 석준은 이 약속을 꼭 지키려는 심산은 아니었다.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만 훔쳐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뇌이고 있었다.
어제 새벽 채팅을 끝내고부터 30분 전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석준은 자신이 왜 ‘길거나혹은굵거나’와 만나기로 약속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일단은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 다음은 빙글빙글 겉도는 것에 질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 자신이 정말 게이가 아닐까 따져 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본인이 깨닫지 못하는 욕망을 과연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게이도 아닌 그가 이렇게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쩌면 논리적이거나 통상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게 그저 즉흥적인 도박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무엇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던져버릴 기회를 찾아 도박판으로 몰려든다. 이긴다는 보장이나 자신이 없어도 수중에 있는 돈을 한꺼번에 걸어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석준도 이제까지 차곡차곡 긁어모아온 자기 자신을 통째로 판돈으로 걸어놓고 차라리 잃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언덕 위에 있는 ‘초록앵두’라는 커피 전문점에서 다시 왼쪽 골목길로 접어들어 70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자 드디어 ‘맨투맨’이라는 간판이 저 앞에 나타났다. 석준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했다. 검은색 목티에 사파리 느낌이 나는 진회색 잠바, 흐릿한 갈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사실 이 잠바는 요즘 같은 11월에 입기에는 좀 얇았지만 그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 입고 나온 참이었다. 종훈도 언제가 이 옷이 그에게 잘 어울린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보폭을 좁히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은색으로 반들거리는 간판에는 ‘맨투맨 MAN to MAN’이라는 검은 글씨가 뚜렷하게 쓰여 있었고 깜빡이는 파란색 네온사인으로 ‘Only for Man’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가게는 창문 하나 없이 광택 나는 검은색 철판으로 단단히 둘러싸여 있어서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찾아본 바에 따르면 꽤나 유명한 게이바인 모양이었다. 언젠가 ‘죽은게이의사회’가 자신이 즐겨 가는 곳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어서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야 말로 세상 그 어느 곳에서보다 ‘죽은게이의사회’와 마주칠 확률이 높은 곳이었다.
바 입구 앞에서는 두 명의 남자가 마주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석준은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엉거주춤 뒤를 돌아보며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앞에서 걸어오던 남자와 딱 맞닥트리고 말았다. 우뚝 멈춰선 석준과 남자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석준은 그의 검은 코트를 보는 순간 그만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남자의 첫인상은 너무 의외여서 석준을 더욱 놀라게 했다. 사실 짧은 순간 석준은 이 남자일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너무나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이도 석준과 비슷한 또래였고 단정하게 깎은 머리에 키도 고만고만한, 조금은 통통한 체격을 가진 그런 수수한 남자였다. ‘게이’라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이토록 특징 없는 남자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검은 코트의 남자는 슬쩍 입 꼬리를 올리더니 석준에게 정중히 물었다.
“실례지만, 오늘 8시에 만나기로 했던 분인가요?”
“아, 예, 맞습니다.”
석준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어눌하게 대꾸했다. 긴장 때문에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어두운 밤이 아니었다면 그런 심경을 곧바로 상대에게 들키고 말았을 것이다. 석준은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그의 눈썹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정말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눈동자만 그리로 향해 있을 뿐 머릿속은 거센 파도가 치는 것처럼 먹먹했다. 일이 결국 이렇게 되었다는 게 놀라웠고, 또 혹시 이 남자가 자신이 게이가 아니라는 걸 눈치 챌까봐 겁이 났다.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어떤 표식이나 행동이 있어서 단박에 들키는 게 아닐까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
“아, 그래도 어떻게 한 번에 서로 알아보았네요. 반갑습니다. 그나저나 비슷한 연배인 줄은 몰랐는데요. 말투가 점잖으셔서 저보다 나이가 있으신 분인 줄 알았어요.”
남자는 격식 없이 웃으며 얘기했다. 다른 속셈은 없어 보였다. 어디가면 사람 좋아 보인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법 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묘사할 데라고는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다.
“저는 박안규라고 합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것은 실명일까? 아니면 채팅에서 그렇듯 이것 역시 닉네임에 불과한 걸까. 순간 석준은 자신의 실명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가명을 지어내야 할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서둘러 대꾸했다.
“아, 예, 저는 이석진이라고 합니다.”
가명을 얘기한다는 것이 고작 맨 끝에 한 글자를 바꾼 것뿐이었다. 그것은 본명을 얘기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명을 얘기한 것도 아니어서 석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차라리 종훈의 이름을 말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에게는 그럴만한 배짱 또한 없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통성명 아닌 통성명을 나누고 가볍게 악수를 했다. 따듯하고 까칠한 손바닥이 닿자 석준은 자신도 모르게 턱에 힘이 들어갔다.
“추운데, 우리 술부터 한 잔 하죠.”
안규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드디어 게이바에 들어가는 건가 싶어 석준은 다시금 바짝 몸을 움츠렸다.
“저, 혹시 저기 자주 가세요?”
안규가 ‘맨투맨’ 간판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 아뇨.”
“그래요? 사실 저도 별로거든요. 만나기 쉬운 장소를 얘기하느라 맨투맨 앞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사실 저는 여길 썩 좋아하지 않아요. 안에 들어가면 좀 정신없기도 하구요. 불편하더라구요. 비싸기는 또 좀 비싸야죠. 우리 그냥 간단하게 어디 가서 소주나 한잔 하는 게 어때요?”
석준은 안규를 다시 쳐다보았다. 정말 그는 자신과 별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술 마시기에는 소주집이 제일 편하고 부담 없는 소시민인 30대 중반의 남자 말이다. 석준은 정말 그가 게이인지 의심이 들었다. 더 이상 종잡을 수가 없었다.
"요 앞에 제가 잘 아는 삼겹살집이 있는데, 고기가 괜찮아요. 반찬도 잘 나오구요.”
안규는 석준이 아까 걸어왔던 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석준은 ‘맨투맨’을 슬쩍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마치 철판으로 막아놓은 38선 앞에 선 것처럼 그 너머는 멀고 묘연하기만 했다. 게이바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 ‘죽은게이의사회’가 저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쉽기도 했지만, 일단 석준으로서는 안규의 제안이 반가웠다. 괜히 어설프게 게이바에 들어갔다가 게이가 아니라는 게 들통이라도 나면 큰 낭패였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 우스운 얘기지만 - 저 곳에 들어가면 정말 게이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이었다.
두 사람은 언덕을 50m 정도 내려가 돼지비계 지지는 냄새와 기름진 연기가 자욱한 작은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환한 전등불 밑에서 삼겹살 3인분과 소주를 앞에 놓고 안규와 마주 앉고 보니 석준은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한잔 합시다.”
안규가 먼저 소주병을 따서 그의 잔에 따라 주었다. 석준도 병을 받아 안규의 잔에 술을 따랐다. 두 사람은 예의바르게 서로 건배를 하고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다행히 소주는 맛있었고, 술이 한잔 들어가자 석준도 조금 긴장이 풀리는 듯 했다. 안규는 두 잔 째 소주를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저는 그냥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입니다. 이탈리아에서 가구하고 인테리어 소품을 수입해서 파는 회사에요. 사실 지금도 일하다가 오는 길이에요. 일요일에도 출근하라면 해야지 별 수 있나요. 뭐, 요새는 경기가 안 좋아서 언제 잘릴지 모르지만요. 하긴 경기가 좋다고 해서 안 잘리는 건 아니죠. 언제나 핑계는 있으니까요.”
안규는 껄껄 웃으며 고기를 뒤집었다. 행동거지가 소탈하고 싹싹했다. 그런 안규의 모습에 석준은 그만 자신의 직업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는 학원 강사에요. 중, 고등학생들한테, 저기, 수학을 가르치고 있어요.”
“야, 그래요? 선생님이셨네요. 학원 강사면 벌이도 괜찮겠어요?”
“다 옛날 얘기에요. 지금은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경쟁 학원도 많이 생겼고, 저희도 경기를 많이 타거든요.”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교육산업이 괜찮은 편이잖아요. 사실 그 정도면 불황이 없는 사업이에요. 제가 하는 일만 해도 정말 전망이 불투명하거든요. 유럽 수입 가구 수요도 한정돼있는데다가 점점 저가 경쟁으로 치닫고 있으니 말입니다. 중국산이 큰 걸림돌이죠. 이래저래 걱정이 많아요. 그래서 생각다 못해 저도 얼마 전부터 주식을 시작했어요. 주변에 주식으로 재미 본 사람들이 꽤 있어서요. 그런데 그것도 영 신통치가 않네요.”
두 사람은 경제, 국제정세, 주식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이래서야 회사 동료와 한 잔 하는 술자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석준은 이 남자가 정말 어제 자신과 음란한 농담을 섞어가며 채팅을 했던 ‘길거나혹은굵거나’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아니면 채팅방에서 했던 말들은 모두 장난이었을 뿐이고 실은 그저 술친구가 필요했던 걸까.
“결혼은 하셨어요?”
안규가 입가에 묻은 술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물었다.
“아니오.”
“저도 아직이에요. 애인은요?”
석준은 안규가 여자 애인에 대해 묻는 건지, 아니면 남자 애인에 대해 묻는 건지 알 수 없어 입술을 우물거렸다. 하지만 곧 그런 자신이 우스워졌다. 어느 쪽이든 그의 대답은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없어요.”
“그래요? 저는 만나는 여자가 있긴 해요. 그렇다고 심각한 사이는 아니구요. 사촌 누나가 소개시켜 준 여자인데, 일단은 그냥 만나보는 중이에요. 어머니는 그 여자하고 결혼했으면 하시지만, 글쎄요. 어떻게 될 지는 두고 봐야죠.”
석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남자와 만나면서도 따로 사귀는 여자가 있다는 이 남자의 속편함과, 이런 상황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을 그 여자의 속편함을 생각하니 석준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석준의 심정을 눈치 챘는지 안규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저 양성애자 아니에요. 왜요? 여자 만난다니까 좀 그래요?”
“네? 아니오. 저야 상관없죠.”
“그럼 다행이구요. 이런 걸 무척이나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무슨 변절자나 이중스파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요. 특히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말이에요.”
“네, 맞는 말씀이죠.”
석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연애해본 게 언제에요?”
안규가 소주를 넘기며 물었다.
“아, 글쎄요. 한 3년 쯤.”
석준은 대충 주워 넘겼다.
“그 쪽도 꽤 됐네요. 저도 2년가량 됐어요. 그게 안하다 보면 또 안하게 되죠? 나이가 들다 보니까 연애도 좀 귀찮더라구요. 그냥 이렇게 즉흥적으로 만나는 관계가 더 편할 때도 있고. 서로 잘 모르니까 딱히 기대도 없구요. 오히려 충분하달까, 뭐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주 사람 만나는 편이에요?”
“아뇨. 자주는 아니구요.”
“어쨌든 서로 비슷한 연배라 기분이 좋네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기도 하고.”
안규는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기 몇 점을 입 안에 쑤셔넣고 기운차게 씹어 삼켰다. 큼직한 돼지고기 조각이 안규의 입으로 성큼성큼 사라지는 걸 보고 있자니 석준은 정말로 그가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살갑게 느껴졌다. 그래서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두 병에 이어 세 병을 비워갈 쯤에는 석준도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두어 번인가는 기꺼이 큰 소리로 웃기도 했다. 안규가 세 번째 병에 남은 마지막 술을 석준에게 따라주며 이렇게 묻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제가 깜빡하고 묻지를 않았는데, 탑이세요, 바텀이세요?”
석준은 입술로 가져가던 술잔을 멈추었다.
“사실 크게 상관은 없어요. 제가 전천후라 어느 쪽이든 맞춰 드릴 수 있거든요. 하지만 나는 바텀 역할이 더 좋던데. 그쪽은 어때요?”
“그게, 저는 탑인데요.”
석준은 꾸역꾸역 주워 삼키듯 대답하면서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모두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얘기가 다른 테이블까지 들릴 염려는 없었다.
“그래요? 잘 됐네요. 이왕이면 궁합이 맞는 게 좋죠. 자,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 모텔에 갈 거 없이 그냥 우리 집으로 가죠? 그편이 모텔비도 안 들고 더 맘 편하게 있을 수 있잖아요. 괜찮죠?”
안규는 사람 좋게 씩 웃어보였다. 마치 당구라도 한 판 치자는 식이었다. 그리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어이구’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자, 더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갑시다. 내일 출근도 해야 되는데.”
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안규의 모습을 보면서 석준은 안규와 자신 사이에는 실상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석준과 안규는 술집을 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로 향했다. 안규가 서두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원래 발이 빠른 건지, 석준은 안규와 보폭을 맞추기 위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빨리 걸어야 했다. 큰길가에는 귀가하는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가 여러 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그 중 한 택시에 올라탔다.
“기사님, 방배초등학교 앞으로 가주세요.”
안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택시는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태연하게 택시에 올라타기는 했지만 숨이 차고 당혹스러워서 석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모든 게 너무 빨리 진행되는 바람에 얼떨떨했다. 목적지를 뻔히 들었으면서도 어디로 가느냐고 자꾸만 묻고 싶었다. 이제 그에게는 이것을 멈추거나 지연시킬 명분도 용기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발견된 열 가지 증거가 모두 그를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있는 것처럼 꼼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가파른 숨을 고르며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까까지 신나게 떠들어대던 안규도 택시에 탄 이후로는 말이 없었다. 나란히 붙어 앉은 모양새가 어색하기도 하고 또 딱히 할 말도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비스듬히 돌아앉아 각자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10분 정도 지나자 차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 졌다. 아까부터 조바심이 나있던 석준은 참지 못하고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쩌나 조마조마 했지만 안규는 어느새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무겁고 규칙적인 숨소리로 보아 꽤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정말 속이 편한 남자였다. 이런 일이 안규에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어쨌거나 긴장이 풀린 석준은 숨을 돌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택시는 88도로를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어두운 바다 속을 나아가는 작은 잠수함처럼 밀폐된 택시 안은 어둡고 적막했다. 하루 종일 틀어놓은 히터의 탁한 공기와 숨 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술 냄새가 뒤섞여 그의 눈꺼풀 역시 무거워졌다. 나른하게 밀려들어오는 노란색 가로등 불빛과 희미하게 오르내리는 안규의 숨소리에 둘러싸여 그는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그 때 안규의 손이 미끄러지면서 석준의 허벅지 위에 닿았다. 석준은 어깨가 굳은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군가 그의 얼굴에 찬물 한바가지를 확 끼얹은 것 같았다. 그의 허벅지에 맞닿아있는 손의 무게야말로 이 세상 무엇보다도 자명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석준은 안규의 집에 도착한 뒤 벌어질 일들을 차례차례 떠올려 보았다.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어쩌면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겁이 났다.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팽팽함이 목젖에서부터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다시 안규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 위로 짙은 물살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반쯤 모래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다. 안규의 무방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석준은 가슴이 뛰었다. 이 남자는 경계 따위는 사뿐히 밟고 일어서서 남자를 만나는 것도 여자를 만나는 것도 - 아마 그보다 더 한 어떤 것에도 -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의심하기 보다는 뛰어드는 데 익숙했고 상처 받는 것만큼이나 상처 주는 것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 자유란 그런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란 무언가를 짐짓 모른 척 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석준은 자신의 허벅지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안규의 두툼한 손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 손은 그를 집요하게 부추기고 있었다. 석준은 이것이 기회인지 함정인지 가늠하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했다. 하지만 그는 애초부터 자신이 기회와 함정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상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기회이든 함정이든, 혹은 다른 무엇으로 이름 붙이든 간에, 분명한 건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뒤엎어져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가 돼버릴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이것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 손을 잡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안규와 함께 오늘 밤을 보내고 나면, 어쩌면 석준은 모레에는 ‘죽은게이의사회’를 만나러 갈지도 모른다. 그럼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걸까?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걸까? 이번에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걸까?
꼼짝 않고 앉아있던 석준은 운전사 쪽으로 머리를 숙이더니 차를 세워달라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리고 운전사에게 2만원을 건네주며 안규를 목적지까지 잘 태워달라고 부탁하고 살며시 택시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문을 닫자마자 택시는 주저 없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 버렸다. 석준은 택시가 사라진 밤거리 너머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노란 불빛의 파도가 모든 걸 휩쓸고 지나가 버린 뒤에, 그는 안전하고 메마른 곳에 홀로 버려져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