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켰다. 조용하고 어둡던 방에 금세 웅성웅성 활기가 돌아서 석준은 그제야 자신의 집이 정말로 자신의 집같이 여겨졌다. 빨리 푹신한 소파에 머리를 묻고 나른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겨울비에 젖어 뻣뻣해진 코트를 벗으려던 석준은 목을 움츠리며 기침을 해댔다. 벌써 한 달 째 감기가 낫지 않고 있었다. 감기약을 먹고 있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약사 말로는 요즘 감기는 변종이 많아서 약이 잘 듣지 않는다고 했다. 언젠가 인류가 멸망한다면 감기 때문일 거라는 농담까지 덧붙였다. 코를 훌쩍이며 휴지를 찾고 있는 동안 코트 주머니 속에서 문자가 왔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석준은 핸드폰을 꺼내보지도 않고 그대로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 놓았다. 윤주일 게 뻔했다. 며칠 전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통보한 후부터 윤주는 매일 10통도 넘는 문자를 보내오고 있었다. 문자들은 모두 그렇고 그런 내용들이었다. 애원하고, 사과하고, 협박하기도 하는……. 이제 석준은 그 문자들을 읽지도 않고 한꺼번에 지워버리곤 했다. 윤주에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얼마 후면 그녀도 이 일을 떠올리며 시시해 할 거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더 오랫동안 기억을 끌고 갈 쪽은 석준일지도 모른다.
석준은 휴지로 코를 힘차게 풀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는 가방을 뒤져 검은색 비닐에 싸여있는 상자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조금 전 태우네 가게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태우가 억지로 가방에 쑤셔 넣어주는 것을 석준은 몇 번 쯤 거절하다가 못이기는 척 받아 넣었다. 이중으로 꽁꽁 싸여있는 포장지를 벗겨내자 상아색 종이상자가 나타났다. 상자에는 투명한 비닐로 덮인 네모난 구멍이 있어서 안의 내용물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몸통도 다리도 없는 커다란 엉덩이 모양의 남성용 자위 기구였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포르노 여배우의 엉덩이와 항문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상자 위에 쓰여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기구의 보송보송한 탄력이나 보드라운 감촉, 뽀얀 색깔이 실제 사람의 것과 무척이나 흡사해 보였다. 그리고 하얗고 포동포동한 엉덩이 사이에는 너무나 말랑말랑해서 손가락이라도 쑥 넣어보고 싶은 구멍이 있었다.
[저도 써봤는데 아주 끝내 줘요.]
[그래?]
[이게 진짜 여자보다 낫다니까요.]
[그래?]
태우는 그의 팔꿈치를 잡으며 말했다.
[친구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해요.]
석준은 자위기구 상자를 책상 위에 놓아두고 리모컨부터 찾기 시작했다. 이놈의 리모컨은 또 어디로 갔나. 언제나 이 젠장맞을 리모컨이 문제였다. 필요할 때면 이상하리만치 눈에 띄지 않는 리모컨을 찾으려고 한참동안 거실을 뒤지던 그는 결국 소파 옆에 떨어져 있는 리모컨을 찾아내어 손에 쥐었다. 그는 소파에 진득하게 눌러앉아 이리 저리 채널을 돌려대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기독교 채널로, 기독교 채널에서 요리 채널로, 요리 채널에서 영화 채널로, 영화 채널에서 게임 채널로, 게임 채널에서 뉴스 채널로, 그리고 만화 채널로……. 오늘도 텔레비전은 재치 있고 매력적인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평생 이렇게 텔레비전만 보고 살아도 전혀 지루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전에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석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뭉근하게 부벼대는 소리와 함께 모니터가 환하게 밝아졌다. 등 뒤의 텔레비전에서는 무슨 코미디 쇼라도 하는지 와악 하는 웃음소리가 요란했다. 그는 종훈에게 간단한 안부 메일이나 쓸 생각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지만 며칠 전에 보냈던 메일에 종훈이 아직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그만 두었다. 어차피 며칠 안으로 짧은 답장이 오거나 아니면 종훈이 직접 전화하리란 걸 석준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달 쯤 밀린 숙제를 처리하듯 한 번 만나 적당히 서로 술잔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10년이 넘은 친구사이라는 건 단순한 친구도, 그렇다고 가족도 아닌 애매한 관계였다. 아마 두 사람은 더 이상 가까워질 여지도 더 이상 멀어질 빌미도 없이 죽을 때까지 이 정도로 지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물이 반 쯤 들어있는 유리컵을 들고 ‘물이 반이나 있네’와 ‘물이 반 밖에 없네’를 동시에 중얼거리면서 마시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것과 비슷했다. 아니, 그것은 단지 종훈과의 관계에 한정된 얘기는 아니었다. 석준은 자신의 인생이야말로 딱 반쯤 채워진 물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나아질 여지도 더 이상 나빠질 빌미도 없이 죽을 때까지 이 정도로 지내게 될 것이다.
코를 훌쩍이며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석준은 슬그머니 시연의 블로그를 들어가 보았다. 시연의 블로그는 며칠 전 정은의 홈페이지를 방문했다가 그곳에 남겨진 시연의 댓글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되었다.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또 그러려고 했지만, 결국 그는 그녀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말해, 시연은 잘 지내고 있었다. 사진 속의 새남편도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시연이 임신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블로그에 떡하니 초음파 사진이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순간 놀랐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전 아내의 임신 소식에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조금 당황스러웠을 뿐이었다.
오늘 그녀의 블로그에는 그녀의 남편이 사왔다는 배냇저고리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석준은 그 부드러운 연두빛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기 옷이 어른 손바닥만큼 작다는 사실에 석준은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귀여웠지만 동시에 징그럽기도 했다. 저 작은 아이가 언젠가 이만큼이나 부풀어 올라 거인 행세를 하리란 걸 생각하니 끔찍했다. 그 외에 그는 시연이 당분간 회사를 쉬기로 했다는 것과, 춘천에 있는 시댁에 다녀오는 길에 올해 첫눈이 왔었다는 것, 그리고 산모를 위한 흔들의자를 새로 장만했다는 것 등을 알 수 있었다. 시연은 정말이지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사진 속 그녀의 눈빛에 따듯한 생기가 돈다는 걸 석준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시간은 이제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시연의 블로그를 빠져 나오자 또다시 할 일이 없어진 석준은 여러 사이트들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뭘 찾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돌아다니는 걸 멈출 수 없을 뿐이었다. 영화 관련 사이트, 홈쇼핑 사이트, 유머 사이트, 엽기 사이트 등등……. 마지막으로 그는 채팅 사이트에 들어갔다. [폐륜의 상대성 이론] 채팅방에는 수많은 닉네임들이 모여 있었지만 ‘죽은게이의사회’는 보이지 않았다. ‘죽은게이의사회’가 자취를 감춘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 영영 오지 않을 셈인 걸까? 이제껏 '죽은게이의사회'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머리 위를 어지럽게 맴돌았지만 ‘죽은게이의사회’ 라는 사람의 모습은 전혀 그려낼 수가 없었다.
MSG▶ 이거면 충분해
정말 이걸로 충분한가.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모니터의 창백한 빛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대로 주체할 수 없이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석준은 두려워졌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걷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석준은 곧 아무렇지 않게 휴지에 코를 풀었다. 자신이 일부러 상투적인 감상을 짜내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이 모든 걸 냉정하게 관조해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큼 신랄하게 말이다. 고개를 들어보면, 삶은 그저 편린의 현상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텔레비전 화면 같았다. 순서도 없고 근거도 없고, 서로 연관이 있는 듯 하지만 실은 각자 소외되어 있거나 어긋나있는 순간들의 나열이었다. 이 무모함을, 이 애매함을 끝내는 방법은 모두가 알다시피 간단했다. 그 무엇에도 이유나 의미 같은 건 없다는 걸 깨끗이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균형을 잡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완벽한 불균형을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누구도 완벽한 균형을 감당할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겸연쩍게 서성거려야 한다. 이것은 ‘길을 잃다’ 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갈 곳도 돌아올 곳도 없기 때문이다.
어느새 입가에 무덤덤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듯 뻔뻔하게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것은 사소한 한 장의 흑백 사진 같아 보였다.
[산다는 것…….]
그는 별다른 감상 없이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어쩌면 산다는 건 생각만큼 거창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
그는 기침을 몇 번 하다가 쓰레기통에 가래를 뱉어 냈다.
[나른하게, 조용히]......[천천히 멀어지지만].......[아무 미련도 없고, 별 거부감도 없이]........[당연하다는 듯이]........[물에 떨어진 휴지 조각이 뭉근히 풀어져 가는 건].......[위아래가 없는]........[평평하게]........[무심하게].........
*** [빨간끈팬티]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빨간끈팬티▶ 안녕^^
에널자이저▶ 안녕~
에널자이저▶ 아, 잠깐만
*** [에널자이저]님이 닉네임을 [끈팬티매니아]로 바꾸었습니다.
끈팬티매니아▶ 하이~ 그 팬티 내가 벗겨도 될까? ㅋㅋㅋ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