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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y 15. 2024

좀 더 순진하게 (52)




     며칠 뒤, 나는 여름휴가를 이용해서 낙태 수술을 받았다. 아이를 지운다는 건 정말이지 별것 아니었다. 조금 불쾌하고 불편하더니 금세 감쪽같이 끝나버렸다. 애초에 뱃속의 아이라는 것 자체가 허깨비에 불과했다. 인간의 바깥, 언어의 바깥, 혹은 지도 바깥의 어떤 지점처럼.

     병원을 나와 흔들리는 전철 속에서 몸을 가누려고 애쓰며 나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더위에 지쳐 있었고 뻔한 하루 일과에 지쳐 있었다.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들 모두 각자 생일이 있고, 비밀이 있고, 거짓말을 하고, 불안해하고, 어리둥절해하며, 불행하다는 것이 사실일까?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인격이 있다는 현실을 어떻게 참아내야 하나? 아기들은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처음 확인하는 순간 감탄과 반가움에 소리 높여 환호를 지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환호인 동시에 분명 경악일 것이다. 밤하늘의 빛나는 달이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처음 확인하는 순간 느낄 법한 경악.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누가 죽더라도, 혹은 이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혹은 온 우주가 산산이 바스라지더라도 끝까지 웃을 수 있는 유머 감각뿐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무언가가 별안간 떠올라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수연이와 현기네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곧바로 전철을 갈아타고 왕십리로 향했다. 가는 동안 내내 멀미가 나고 아랫배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참을 만했다. 왕십리역에 내렸을 때에는 저녁 7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나는 수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수연아, 나 민주야. 지금 회사 일 때문에 이 근처에 왔다가, 저기, 바로 퇴근하게 돼서 너희 집에 잠깐 들를까 하는데, 괜찮아?”

     “괜찮긴 한데, 실은 내가 감기에 걸려서 누워 있거든.”

     “그래? 약은 먹었어?”

     “아니, 좀 자면 낫겠지. 사러 나가기도 귀찮고.”

     “그럼 내가 감기약 사가지고 갈까?”

     “그럴래? 그럼 고맙지.”

     “현기 씨는?”

     “오빠는 집에 있는데 저녁 약속이 있어서 조금 있으면 나갈 거야.”

     현기가 곧 나간다는 말에 나는 서둘러 수연이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꼭 현기의 얼굴을 봐두고 싶었다. 그게 옳은 일인 것 같았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파트 근처에 있는 약국까지 뛰어갔다.

     “저, 감기약 주세요.”

     나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소리쳤다. 20대 후반의 앳돼 보이는 여자 약사가 칸막이 뒤에서 나왔다. 

     “누가 감기에 걸리셨는데요?”

     “아, 저요. 제가요.”

     “네에, 정말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요새 독감이 유행이라 조심하셔야 돼요. 이거 한 알하고 이거 두 알씩, 하루 세 번 식후에 드세요. 감기는 푹 주무시는 게 최고예요.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내가 환자라는 생각에 의례히 한 말인지, 아니면 정말 내 안색이 안 좋기라도 했는지, 약사는 입술을 쫑긋거리며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나는 나오면서 약국에 걸려 있던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정말이지 얼굴빛이 칙칙하고 푸석푸석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낙태 수술 때문이 아니라 오늘 따라 화장을 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늘 화장하던 여자가 화장을 하지 않으면 처음 보는 사람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채기 마련이었다. 어쨌거나 이 모습으로 수연이 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수연이네 아파트의 어두운 층계참에 앉아 화장을 했다.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펄이 들어간 립스틱도 바르고, 눈썹도 칠했다. 손거울을 보니 그제야 멀쩡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나는 볼에 붉은 터치를 넣어 좀 더 발그레하게 만들고는 층계를 올라가 수연이네 집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에서 현기가 물었다. 나는 숨을 짧게 들이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민주예요.”

     현기가 문을 활짝 열었다.

     “아, 오셨어요?”

     나는 고개를 꾸벅 굽히고는 말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수연이는 보이지 않았다.

     “덥죠? 잘 지내셨어요?”

     소파에 앉은 나에게 현기가 선풍기를 틀어주며 물었다.

     “저야 늘 똑같죠. 그런데 수연이는요? 약을 사 왔는데.”

     “잠들었어요. 어제부터 골골하더니 오늘은 아예 맥을 못 추네요. 집에만 있는 애가 어디서 감기에 걸렸는지. 저는 약속이 있어서 곧 나가봐야 돼요. 오래전에 했던 약속이라 취소할 수가 없었어요. 수연이 혼자 두고 가기가 좀 그랬는데 민주 씨가 와서 다행이네요.”

     평소와 다름없이 태평하고 번지르르한 현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를 뒤흔들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내게 그런 힘이 있다는 사실에 몇 번이나 이를 악물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인중에 맺혀 있던 땀이 선풍기 바람에 식었을 때쯤에는 나도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찬찬히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현기는 내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낙태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생을 마칠 것이다. 설사 현기가 죽는 순간 자신의 일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게 되더라도 그 사실은 그의 이야기에서 쏙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밀도 이야기도 결정도 모두 내가 차지하는 거야. 이 정도면 – 설사 그것이 자학일지라도 - 기꺼이 웃어줄만 하지 않은가. 나는 고개를 돌려 현기를 바라보았다. 눈앞이 겨울 하늘처럼 맑았다.

     “요새 시 쓰는 건 어때요?”

     내가 물었다.

     “그냥 그래요.”

     “왜요?”

     “도대체가 쓸 만한 일이 있어야죠.”

     “그럼 쓸 만한 일을 만들면 되잖아요.”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는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수연이 좀 깨울까요?”

     현기의 말에 나는 안방 문을 살펴보았다. 안방 문은 꼭 닫혀 있었다. 

     “아니에요. 좀 자게 두세요.”

     그리고 나는 나직이 덧붙였다.

     “그런데 말이죠, 당분간은 못 만날 것 같아요.”

     “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현기의 얼굴이 곧 굳어졌다. 그는 분명 나를 뻔뻔하고 되바라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게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내심 살기라도 띠었을지 모른다. 나는 그가 경멸조로 화라도 내기를 기대하며 그의 표정을 빤히 살펴보았다. 

     “왜?”

     하지만 의외로 현기가 얼버무리지 않고 똑바로 물어 왔기 때문에 나는 당황했다. 사실 이것은 별다른 얘기가 아니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한두 달 정도는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충고했기 때문이었다. 

     “요새 회사 일이 좀 바빠. 나중에 연락할게.”

     현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수연이를 깨우는 게 좋겠네요.” 

     현기는 두 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닫았다. 잠시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연이가 얇은 이불 한 장을 어깨에 두르고 안방에서 나왔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귀 뒤로 넘기고 세수도 안 한 꾀죄죄한 얼굴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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