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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y 10. 2024

좀 더 순진하게 (51)




     “피곤하면 내가 할까?”

     어느새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내게 희진이가 물었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나를 눕히고 내 위로 올라갔다. 나는 이미 욕구를 잃었고, 혼란스러웠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결국 여러 번 절정을 맞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났다. 끊임없이 귓가로 밀려드는 파도 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에어컨 바람에 한기가 들었는지도 모른다. 희진이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제 몇 시간이나 운전을 한 데다 드물게 집요한 섹스였으니 녹초가 됐을 만도 했다. 희진이의 맨발 하나가 이불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는 게 보였다. 엄지발톱에는 분홍색 매니큐어가 예쁘게 칠해져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살며시 일어나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 눈부신 햇살에 저절로 눈길이 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숨이 멈출 정도로 파랗고 광대한 바다가 눈앞에 있었다. ‘바다’라는 진부한 단어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영원한 현재형의 바다였다. 나는 여관을 빠져나와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발밑은 온통 뜨거운 모래밭이었다. 나는 모래를 푹푹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피서 철이라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바다에 비하면 그들은 해변에서 굴러다니는 빈 조개껍데기에 불과했다. 나는 파도가 치는 곳까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곳까지 걸어갔다. 발밑으로 밀려온 파도가 하얀 거품이 되어 부풀어 오르다가 다시 밀려갔다. 그리고 방금 전 파도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파도가 발끝을 적시며 밀려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수천의 파도 저 너머로 이어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멀고도 넓은 세상이었다. 시선조차 닿을 곳 없는 한없는 허공에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동안 수직의 세계에 갇혀있어서 수평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나. 오직 깊이만이 나의 유일한 공간이 되어버렸을까. 별안간 파도가 세차게 밀려와서 나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밀려나가는 파도를 따라 다시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여기까지라는 건지, 여기서부터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햇빛에 이마가 뜨거워지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여관으로 돌아와보니 희진이는 샤워를 마치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조금 바닷가를 거닐었다. 오후의 해변은 더 많은 사람들로 바글거렸고 달구어진 전자레인지 안처럼 뜨거웠다. 결국 우리는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일찌감치 서울로 출발했다. 나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가는 내내 기진맥진 앉아 있었다. 희진이는 여전히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내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어두워진 뒤였다. 희진이는 근처에서 저녁이라도 먹자고 했지만 나는 그저 빨리 자리에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냐, 피곤하기도 하고, 몸도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그냥 들어갈게.”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든 순간, 나는 희진이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왜, 무슨 일 있어?”

     “실은 할 얘기가 있어.”

     “할 얘기? 뭔데?”

     “나 만나는 남자 있어.”

     “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만나는 남자가 있다고.”

     “그러니까, 사귄다는 거야?”

     “뭐, 그런 거지.”

     희진이는 거침이 없었다. 밋밋하고 말랑말랑한 얼굴에는 별다른 소감조차 없었다.

     “같이 잤어?”

     그만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이, 3류 드라마 속 경박한 대사가 불쑥 튀어나와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순서의 문제였을 뿐 결국 이것을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번.”

     “누구야?”

     “우리 레스토랑 사장.”

     예전에 레스토랑에서 봤던 훤칠한 키의 남자, 중고차 가게 사장이 연신 형님이라고 불렀던 그 남자였다. 언젠가 보너스라며 사장이 준 명품 가방을 희진이가 자랑한 적도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별안간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뭐 물어볼 거 없어?”

     희진이는 떳떳했다.

     “남자도 만날 수 있나 보지?”

     툭 말해놓고 보니 비꼰 것처럼 되었다.

     “그 남자 좋아해?”

     “괜찮은 사람이야.”

     “돈 때문이야?”

     희진이가 입술을 찡그렸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야. 단지, 여러 가지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아직 확실한 건 없어.”

     “그럼, 나하고는 어떻게 할 건데?”

     희진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글쎄,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이게 늘 희진이가 치는 덫이었다. 실상 선택권이 없는 사람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것. 그렇게 유일한 선택지를 관대하게 허락하는 것.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매섭게 쏘아 붙였다. 그러나 막상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에는 김이 빠져 있었다. 

     “민주야,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해?”

     나는 그만 헛웃음이 터졌다. 이런 질문은 10년 전에 했어야만 마땅했다. 그리고 그 10년 동안에도 언제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이제 와서 날 어떻게 생각하냐고?

     “잘 모르겠는데.”

     대충 말해놓고 보니 이것은 진심이었다. 정직하고 성의 있게 고심했어도 나는 꼭 이처럼 말했을 것이다. 나도 희진이와 내 관계에 대해 고민했던 때가 있었다. 그것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 위해, 최소한 분류라도 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정의는 최종 여집합을 가려내는 것이고 분류는 수많은 교집합을 포기하는 것이어서, 결국 부분적이고 주변적인 것들만,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는 것들만 남기 마련이었다. 다만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만약 내가 희진이에게 첫눈에 끌리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로 희진이를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질문인지 대답인지 모를 단답형으로 희진이는 간편하게 대화를 끝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희진이에게 할 말이 있었다. 아직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희진이는 이미 그 모든 질문에 그럴듯한 대답을 준비해놓았을 것이다. 그 대답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럴듯한 대답 따위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들어와 내 방을 둘러보았다.  희진이가 옳았다.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 보았자 똑같은 장소, 똑같은 사람들, 똑같은 문제들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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