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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y 24. 2024

좀 더 순진하게 (53)




     “왔어?”

     수연이는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기침을 여러 번 해대더니 들고 있던 휴지로 코를 훌쩍이며 인사를 했다. 그 뒤로 현기가 외출할 채비를 마치고 방에서 나왔다.

     “저는 지금 나가봐야 돼요. 다음에 또 뵙죠. 아, 저기 그나저나 수연이가 오늘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저러고 있었는데, 뭘 먹어야 약도 먹을 텐데, 죄송하지만 민주 씨가 식사 좀 챙겨주실래요?”

     “예에, 그럴게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현기는 내게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나는 현관문을 빠져나가는 현기의 뒷모습을 보면서 비밀을 독점하는 건 우월감과 모멸감을 모두 떠안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현기가 나가자 수연이는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기침을 해댔다. 나는 냉장고를 뒤져 양파, 당근, 소고기, 피망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잘게 다져서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볶다가 물과 밥을 넣고 한참을 저으며 끓였다. 부엌 안은 냄비의 열기로 푹푹 쪘고 땀이 비 오듯이 흘러 금세 속옷까지 젖었다. 도중에 아랫배가 쿡쿡 쑤실 때면 나는 잠깐씩 배를 움켜잡고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다. 어쨌거나 죽은 잘 끓여졌다. 나는 그릇 두 개에 죽을 나누어 담고 이것저것 밑반찬을 꺼내 식탁을 차린 뒤 소파에 누워 있던 수연이를 데려와 자리에 앉혔다. 

     “왜 너도 죽을 먹어? 너는 밥을 먹지.”

     수연이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끓이다 보니까 나도 먹고 싶어졌어. 여름이라 밥맛도 없고 소화도 잘 안 되는데 좋지 뭐. 빨리 먹자.”

     수연이는 한 숟가락 맛을 보더니 입에 잘 맞는지 얼른 한 숟가락을 더 들었다. 나도 입안으로 죽을 떠 넣었지만 목젖이 바짝 말라있어서 삼키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아랫배의 통증은 이제 꽤 심해져서 다리가 꼬일 지경이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며칠간 배에 통증이 있을 거라고 미리 주의를 주었지만 어느 정도의 통증인지는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혹시 수술이 잘못된 게 아닐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갈가리 찢어진 아이의 사체 중 일부가 아직 뱃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도 스쳐 지나갔다. 가령 손가락이나, 팔, 다리, 눈이나 부서진 머리 조각 같은 것들 말이다. 뱃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 손톱만큼 작은 주먹 쥔 손을 생각하자 나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혹시 다음 생리 때 피에 섞여 나온 신체의 일부를 보게 될까 봐 진저리가 쳐졌다. 

     “진짜 네가 현기 오빠보다 100배 낫다. 오빠는 걱정하는 척만 했지 완전 허당이야. 여자 친구가 아픈데 자기 약속 있다고 쌩하니 나가는 거 봐.”

     수연이는 거하게 코를 풀면서 투덜거렸다. 

     “그럼 헤어져.”

     “어?”

     “네 말대로 여자 친구가 아픈데 밥도 챙겨주지 않는 남자하고는 헤어지는 게 낫지 않아?”

     나는 제법 냉정하게 말했지만, 수연이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도 오빠가 내 생각 많이 해. 무뚝뚝해 보이지만 둘이 있을 때는 애정 표현도 제법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태평하게 노닥거리는 수연이의 모양새에 나는 속이 비비 꼬였다. 

     “만약에 말이야, 나중에 현기 씨가 바람이라도 피운다면 어쩔 거야?”

     “바람?”

     “남자들은 살면서 한두 번은 그런다잖아.”

     “에이, 아니야. 오빠가 얼마나 간이 작은데. 그런 짓을 할 배짱도 없어. 직장하고 집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가끔 친구들 만나는 거 빼고는.”

     “그러니까 만약이지. 만약에 현기 씨가 어떤 여자랑 하룻밤 사고라도 친다면 어떻게 할래?”

     “음, 글쎄.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그냥 몰랐으면 좋겠는데.”

     “몰랐으면 좋겠다고?”

     “알게 되면 돌이킬 수가 없잖아.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닌지도 모르는데. 사실 살면서 생기는 골치 아픈 일들이란 게 막상 몰랐으면 그만인 경우가 대부분이지.”

     나는 기가 막히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해서 할 말을 잊었다. 이런 수연이를 모자라다고 해야 하는 건지, 순진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비겁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간사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오히려 현명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간에, 그 평화는 견고하고 무참했다.  

     식사가 끝나고 수연이에게 약을 먹여 침실로 보내놓고 나서 나는 설거지를 했다. 그릇을 씻고, 남은 반찬을 냉장고에 넣고, 식탁을 닦았다. 정리를 끝내고 안방에 들어가 보니 수연이는 조그만 전등을 머리맡에 밝혀놓고 벽 쪽으로 돌아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발길을 돌리려다가, 몸이 고단하기도 하고, 또 무슨 도망이라도 가는 것처럼 서두르는 것도 우습고 해서 화장대 앞에 놓여 있는 걸상에 슬그머니 걸터앉았다. 그제서야 오늘 내가 얼마나 무리를 했는지 실감이 났다. 나는 내 몸뚱이에 짓눌린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리고서 앞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머리통이 다리 사이로 한없이 말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오늘은 참으로 길고 긴 하루였다. 아마도 평생 중에 가장 긴 하루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하루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수연이와 현기의 침실은 언젠가 내가 몰래 들어왔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다만 침구가 여름용으로 바뀌었고 창문에 걸려 있던 분홍색 비즈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침침한 불빛에 비친 수연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잠들어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깨어 있는 사람은 안에 무언가 잔뜩 쑤셔 넣은 내용물이 마구 튀어나오려고 하는 가지각색의 주머니를 연상시켰다. 눈, 입, 코에서 뭔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와서 나 역시 그것에 맞설 만한 힘과 설득력을 짜내야만 했다. 혹여나 더 이상 짜낼 것이 남아있지 않을까봐 얼마나 가슴을 졸여야 하는지. 하지만 잠들어 있는 사람은 깨어 있을 때처럼 더 이상 부글부글 끓어오르지 않는다. 그저 웅크리고 있고, 고여 있고, 가라앉아 있다. 그것은 평화라기보다는 평화 그 너머의 어디쯤이다. 나는 가끔씩 한밤중에 일어나 잠들어 있는 희진이나 현기의 얼굴을 훔쳐보곤 했다. 그들 스스로는 결코 볼 수 없는 그들의 무방비한 얼굴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 얼굴 앞에서 나는 겨울잠을 자러 올라가기 직전 잠시 눈 덮인 산 밑에 홀로 서 있는 조그마한 짐승이라도 된 듯 한 기분에 잠기곤 했다.

     하지만 돌아누워 있는 수연이의 얼굴은 내게 보이지 않았다.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이 한 밤중처럼 깜깜하고, 날이 선 오른쪽 어깨가 얇은 옷 위로 도드라져 있었다. 어찌 보면 사람은 옷장과 같아서 모든 것이 다 앞쪽으로 몰려 있다. 뒤로는 볼 수도, 안을 수도, 말할 수도 없다. 표정이나 인격도 없다. 고작 엉덩이와 항문만이 앞쪽에는 더 이상 자리가 모자라다는 듯 등 뒤로 밀려나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수연이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뭘 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것을 정처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옛날 얘기 하나가 떠올랐다. 어느 그믐밤, 캄캄한 숲 속을 헤매던 한 남자가 검은 머리를 곱게 쪽진 젊은 여자의 뒷모습에 홀려 밤이 새도록 뒤를 쫒았다. 그러나 아무리 쫒아가도 마을이 나오지 않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더니 돌아본 앞모습 역시 쪽 찐 뒷모습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소름끼치는 이야기지만 왜 소름이 끼치는 걸까. 어쩌면 나도 그 남자처럼 앞모습이 없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쫒아 먼 길을 헤매 왔었나. 나는 불쑥 수연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날갯죽지에서 옅은 땀 냄새가 배어 나왔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얼싸안으려다가 별안간 벼락 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수연이가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녀가 미동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이것이 앞모습이었을까. 나는 허우적거리며 수연이의 집을 뛰쳐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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