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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y 31. 2024

좀 더 순진하게 (54)




     그 뒤로 두 달 동안 희진이에게서도, 현기에게서도, 수연이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자 내게도 그 모든 것들이 까마득해졌다. 화장을 지우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처럼 나는 겸연쩍었고 평온을 되찾았고 무기력해졌다. 어쩌면 나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진짜 내 삶을 등한시했었는지도 모른다는 성찰 비슷한 것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진짜’ ‘내’ ‘삶’이라니, 이게 다 무슨 뜻인가. 나는 이 세상을 내가 주관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무심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인생은 완벽하게 허무하다는 비밀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밀에 부쳐두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균질한 일상 속으로 매일매일 기꺼이 함몰되어가는 사람들을 나는 늘 얕잡아 봤는데, 같은 이유로 그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세 사람이 없는 내 일상은 무척이나 단조로웠다. 내게는 그럴듯한 취미 하나 없었고, 휴일에 갈 만한 곳도, 편하게 불러낼 다른 친구도 없었다. 마치 끈 떨어진 연 마냥 한가로웠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그 두 달 동안 나는 경수를 13번이나 만났다. 여전히 우리 사이에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그는 아직 내 손을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딱 한 번 잡으려 했지만 정중하게 내 손목을 잡았다. 그는 마치 수십 겹의 옷을 껴입고 있는 사람 같았다. 설사 그것을 벗어던지려고 마음먹었다 해도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런 경수가 싫지 않았다. 아니, 싫기는커녕 어쩌면 나에게는 꼭 경수 같은 사람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련하듯 반복하는 나의 잠꼬대를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느냐고 물어보지 않을 사람. 그가 나를 이 지긋지긋한 반지하 방에서, 이 그늘진 비밀들에서, 이 눅눅한 이야기에서 빼내줄 수 있을까? 

     그때 별안간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핸드폰 액정을 보니 수연이였다.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어, 수연아.”

     “너무 늦게 전화해서 미안해. 잠들었던 건 아니지?”

     “아니야. 괜찮아.”

     “딴 게 아니라, 내일 일요일인데 다른 약속 없으면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점심 먹을래? 2시쯤에 오면 돼. 희진이도 온다고 했어.”

     수연이의 목소리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았다. 

     “어, 알았어. 갈게.”

     나는 즉시 대답했다. 그녀의 속셈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나는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정각 2시에 나는 수연이 집 앞에 도착했다. 이번만큼은 잠시도 망설임 없이 힘껏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현기의 목소리였다.

     “민주예요.”

     문이 열리며 현기가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현기는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거실에서는 먼저 도착한 희진이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기척에 고개를 돌려 짤막하게 인사했을 뿐 역시나 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나는 희진이 옆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든 게 차분하고 조용했지만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왔어?”

     부엌에서 나온 수연이가 내게 미소를 지었다. 

     “식사 준비 거의 다 됐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잔치국수 만들었는데 괜찮지?”

     수연이는 들고 있던 행주에 손을 닦으며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현기는 화장실 바닥을 물청소하기 시작했고, 희진이는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댔다. 나는 소파에 앉아 발끝에 꼿꼿이 힘을 준 채 옆에 놓여 있던 홈쇼핑 카탈로그를 뒤적였다.

     식사 준비가 끝나고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국수를 먹었다. 중간 중간 소소한 화제들이 오가고 몇 번의 농담도 있었다. 국수를 다 먹은 후에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곧 있을 대통령 선거와 최근에 개봉한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지금 일어날 수 있는 일 중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수연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저기, 오빠하고 나하고 다음 달 22일에 결혼하기로 했어.”

     나는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다음 달이면 좀 급하긴 한데, 실은 우리가 동거하는 걸 부모님들이 알게 됐거든. 그래서 양쪽 집에서 빨리 서두르라고 하셔.”

     “그래? 잘됐네. 축하해. 어, 축하해요, 현기 씨.”

     허둥지둥 말했지만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축하한다고 외치며 희진이를 바라보았다. 희진이는 미리 알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우리 곧 이사도 갈 거야. 일산에 괜찮은 전셋집이 나와서 그저께 계약하고 왔어. 하얀색 이층집인데 깨끗하고 예뻐. 그리고 희진이네 집에서도 가까워. 걸어서 1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을걸.”

     “빨리 걸으면 5분밖에 안 걸려.”

     희진이가 거들었다. 

     “전세 금액이 우리한테 좀 무리이긴 하지만 오빠가 융자를 받으면 해결될 것 같아. 그런데 이자가 좀 부담이라서 2층은 월세를 놓으려고 해. 그래서 말인데.”

     수연이가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네가 2층으로 들어오지 않을래?”

     “어?”

     “너 지금 살고 있는 반지하 월세 빼서 우리 집 2층으로 들어오면 어때? 지금 살고 있는 곳 보증금하고 월세만큼만 내는 걸로 하고. 2층이 넓지는 않지만 반지하 집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햇빛도 잘 들고, 주변에 공원도 있고, 전철도 가깝고.”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렇지만, 현기 씨가 불편할 텐데.”

     나는 허둥지둥 현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현기는 시치미를 뗀 채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아냐. 오빠도 좋다고 했어. 그렇지, 오빠?”

     나는 현기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현기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불편하긴요. 생판 모르는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 것보다는 이왕이면 아는 분이 오면 좋죠.”

     진심일까? 아니면 내 쪽에서 거절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수연이하고 벌써 얘기 끝냈어요. 민주 씨가 와주면 고맙겠다구요.”

     나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도무지 이상한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괜히, 서로, 서로 여러 가지로…….” 

     나는 쓸데없이 말을 더듬었다. 

     “걱정하지 마. 2층은 온전히 너 혼자 쓰는 거야. 1층을 거치지 않고 2층으로 곧바로 올라갈 수 있는 출입문도 따로 있어. 사생활은 철저히 보장될 테니까.”

     사생활? 내게 사생활이라는 게 있었던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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