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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un 06. 2024

좀 더 순진하게 (55) - 완결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

     수연이는 진심으로 나를 설득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진심이라는 게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희진이가 거들고 나섰다.

     “그래, 어두침침한 지하보다야 2층이 훨씬 낫지. 반지하 방에서 오래 살면 몸에도 안 좋아. 환기도 안 되고 습기도 차고, 여름에는 또 얼마나 덥니? 이 집은 거기에 비하면 몇 배는 좋을 거야. 게다가 내 집하고도 가까우니까 자주 만날 수 있잖아.”

     나는 입만 벙긋거렸다.

     “그렇게 해, 민주야.”

     수연이가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현기가 말했다.

     “뭘 망설여.” 

     희진이가 말했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이들 모두를 바라보았다. 

     “아, 그럼 일단 한번 보시고 나서 결정하세요. 아예 오늘 같이 그 집에 가보면 어때요?”

     현기의 말에 수연이가 맞장구 쳤다.

     “그래, 그렇게 해. 너도 직접 보면 분명히 마음에 들 거야.”

     “그럼 집 구경하고 나서 저녁은 우리 집에서 먹자. 호수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희진이 역시 흔쾌히 찬성했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대답할 것도 없이 우리는 희진이 차를 타고 일산으로 향했다. 

     투스카니는 강변북로를 빠르게 달렸고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한강이 굽어 흐르는 서쪽 하늘 너머로 붉게 물든 회색빛 해가 이지러지고 있었다. 아름다웠지만 손톱 끝에 붙여 장식하고 싶으면서도 곧바로 긁어내고 싶어지는 과민한 아름다움이었다. 그것은 내게 불감증의 전희를 연상시켰다. 이윽고 해가 구름 뒤로 넘어가자 어두침침한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시간이 제일 운전하기 힘들더라.”

     희진이가 중얼거렸다.

     “해가 진 것도 아니고, 안 진 것도 아니고.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고, 모든 게 구별이 가지를 않아. 이럴 땐 헤드라이트도 소용이 없어. 서양에서는 이런 시간에 유령이 나온다고 믿는다더라.”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비치고 빛이 드리웠다. 그림자 없는 세상이었다. 어쩐지 모든 게 의미심장하게 생각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시간에 유령이 나타난다는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그림자가 유령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몸을 떨었다. 우리가 너무 빨리, 혹은 너무 느리게 달렸기 때문에 그만 빛과 어둠 사이에 갇혀버린 건 아닐까. 세상은 이 순간을 매일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어쩌면 끝없이 계속되는 억겁에 대한 예감으로 그만 태초부터 시큰둥해지고 말았을까. 모두들 나와 같은 생각인 건지, 아니면 자신들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건지, 차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별안간 수연이가 핸드백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풀더니 “북극이나 남극에서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거 알아? 너무 추워서 바이러스도 살지 못한대”라고 말했다. 잠시 후에는 현기가 “에코를 우리나라 말로 뭐라고 하더라?” 하고 묻더니 곧바로 “아, 메아리지” 하고 스스로 대꾸하며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희진이는 언제부터인지 희미한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유행가 가사와 같지.... 계속 따라 부르게 되는.... 그렇고 그런 사랑....”  

     별안간 나는 좁은 차 안에 함께 모여 앉아 있는 이 사람들 모두가 참을 수 없이 소중하게 여겨져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어쩌면 희진이와 현기와 수연이를 모두 똑같이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똑같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누가 누구여도 상관없다는 걸까? 내가 그들을 정말 구별하고 있기는 한 건가? 나의 기원만큼이나 너의 기원도 불안하고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유행가 가사와 같지.... 모두가 알고 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어째서 지금까지 잊고 있었을까? 우리는 모두 같은 세대였다.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짓을 해대지만 실은 어떤 비밀도 갖고 있지 못한 세대 말이다. ‘허무’의 뜻조차도 우리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1) 텅 빔, (2) 무가치, 무의미, (3) 덧없음, (4) 근거나 결론이 없음, 또는 시작이나 끝이 없음, (5) 내세울 만한 일이 없음, (6) 한심하고 어이없음. 

     자, 그러니 어쩌겠는가. 우리는 각자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시시한 삶에서 뭐라도, 하다못해 구정물이라도 쥐어짜내야 한다. 그것 외에는 대체 뭘 하며 지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시작한 적이 없어 더 얼떨떨한, 예정된 끝이 있어 더 까마득한 그 매일의 일상들을 말이다.

     “자, 다 왔어. 저 집이야.”

     나는 수연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차는 하얀색 집 앞에 멈춰 서 있었다. 그것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집이었다. 목재 질감이 나는 하얀색 합성 시멘트 판으로 벽과 창문이 마감돼 있고 지붕은 짙은 초록색과 회색을 띠고 있었다. 현관 옆에 붙어 있는 작은 꽃밭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흰색과 보라색 꽃들이 만발했다. 어디선가 낙엽과 플라스틱을 태우는 냄새가 풍겨 왔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 누군가 있는 건지 아니면 외출하면서 일부러 켜놓았는지 2층 창문으로 옅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길가에 나란히 서서 다 함께 그 불빛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생각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제 이곳에서 우리가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뒤섞으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연금술이란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나올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엇이라도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나는 이 집 안에 있는 우리 네 사람을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좀처럼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어떤 이야기만이, 속을 알 수 없고 형태도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이야기만이 온통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야기들로 가득 찬 무인도였다. 

     “어때?”

     누군가 내게 물었다. 

     “글쎄.”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최대한 순진하게 웃음을 지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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