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현태로서는 그런 수철이 도리어 못마땅했다. 평소 음모에 대해 그토록 호들갑을 떨어대면서 어째서 이런 일에는 이토록 무심하고 태평한지 알 수가 없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수입 고기, 유전자 변형 콩, 호르몬 돼지, 방사능에 오염된 물고기, 락스에 씻은 곱창, 발암물질이 섞인 가짜 고춧가루, 석회가 들어간 두부, 공업용 색소를 넣은 된장, 식중독 균이 득시글거리는 김치, 몇 번이고 재활용 되는 반찬 등등의 얘기들이 매일같이 뉴스를 오르내리고 있는데 말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음모 중의 음모가 아닌가? 현태는 수철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싶었지만 장황하고 구차한 언쟁이 될 것 같아 그만 두곤 했다.
대나무통 밥은 맛이 썩 좋았고 의외로 수철 쪽이 더 좋아했다. 수철은 큰 사발에 대나무통 밥과 각종 밑반찬들을 쏟아 넣고 비벼서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반면 현태는 정작 제대로 먹지 못하고 깨작이다가 밥을 남기기까지 했다. 된장찌개에서 화학조미료 맛이 강하게 나는 바람에 입맛이 뚝 떨어져버린 것이다. 한 번 그렇게 생각하니 죽순 볶음, 계란말이, 잡채, 무말랭이도 온통 조미료 범벅인 것만 같았고 쌀이나 김치도 중국산이 아닌지 의심이 됐다. 하지만 가장 답답한 것은 그 모든 게 막연한 심증일 뿐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미각은 그의 의심증만큼 예민하지 못해서 화학조미료가 들어간 음식과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뚜렷이 구별하지 못했다. 분명 같은 반찬이라도 그의 기분이나 컨디션에 따라 조미료 범벅이 되거나 자연의 맛이 될 터였다. 더 우스운 건 그렇게 조미료에 질색을 하는 현태도 가정에서마저 화학조미료를 많이 썼던 세대의 아이들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종종 조미료에 입맛이 당기는 걸 참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럴 때면 평소에는 혐오해마지 않던 동네 포장마차로 달려가 조미료가 범벅이 된 싸구려 떡볶이라도 입안으로 밀어 넣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왜에, 음식이 입에 안 맞아? 찬찬히 좀 더 먹어봐요.”
일찌감치 식사를 끝낸 수철이 이쑤시개로 이빨을 쑤시며 새된 발음으로 말했다. 밥투정 하는 어린애를 어르는 투였다. 하는 수 없이 현태는 남아 있는 밥을 푹푹 떠서 입에 넣고는 반찬도 없이 우적우적 씹어서 삼켰다.
그가 가게로 돌아 왔을 때는 햇빛의 방향이 바뀌어 앞 건물의 짙은 그림자가 실내 안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아까의 그 눈부실 정도로 투명하고 나른한 순간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책꽂이에서 책 하나를 꺼내 펼쳐 들었다. 그것은 [꽃잎 하나, 꽃말 하나]란 꽃말 사전이었다. 가끔 꽃의 꽃말을 묻는 손님들에게 대답할 거리를 찾기 위해 읽고 있었지만 두 달이 지나도록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외워야 할 페이지를 펼쳐 들었다. 'ㅅ'의 ‘수국’차례였다.
[수국 - 냉정, 무정, 거만]
그는 수국을 깨끗하고 순진한 이미지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놀랐다. 어째서 냉정이나 무정, 거만과 같은 꽃말을 가지게 된 것일까? 설명을 읽어 보니 토양에 따라 수국의 꽃 색깔이 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빨 사이로 잘게 웃음을 쪼갰다. 토양의 산성과 알칼리성 여부가 수국의 꽃 색깔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꽃의 자연적인 생리 현상에 냉정이니, 무정이니, 거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긴 그나마 수국은 나은 경우였다. ‘애국심’이라는 네모필라꽃의 꽃말처럼 도무지 이유를 종잡을 수 없는 것도 부지기수였고, 심지어 같은 꽃이라도 색깔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예를 들어 장미만 하더라도 색색마다 꽃말이 천차만별이었다. 빨간색 장미는 정열적인 사랑, 흰색 장미는 청순과 순결, 분홍색 장미는 행복과 우아함, 주황색 장미는 열정, 보라색 장미는 이중적이게도 영원한 사랑과 불완전한 사랑을 모두 뜻했다. 거기다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파란색 장미마저도 ‘얻을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이라는 꽃말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이제 곧 일본에서 파란색 장미 품종이 개발된다고 하니 그럼 꽃말도 ‘불가능한 것’에서 ‘가능한 것’으로 바뀌어야 하는 걸까?
만약 사람에게도 일종의 꽃말 같은 게 있다면 과연 자신의 꽃말은 무엇인지 그는 궁금해졌다. 분명 자신에게도 편협하고 근거 없는 누명이 단단히 씌워져 있을 것이다. 고리타분. 숙맥. 나태. 그는 지겨워져서 책을 덮어버리고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년쯤에 일본에서 출시된다는 파란색 장미를 상상해 보았다. 하늘빛에 가까운 연한 파란색일까? 보랏빛 붓꽃처럼 타오르는 듯한 파란색일까? 아니면 몽상에 빠질 만큼 깊고 짙푸른 파란색일까? 어물어물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그는 어느새 고개를 떨구고 졸기 시작했다.
한참을 졸다가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현태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어느새 두 팔에 얼굴을 묻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떡 고개를 들어보니 갈색 점퍼를 입은 한 남자가 막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어제 장미 50송이를 주문했던 청년이었다. 현태는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웅크리고 있었던 탓에 오른쪽 목 뒤쪽이 얼얼했다.
“아아, 오셨어요? 일찍 왔네요?”
“네, 시간이 좀 남아서……. 아, 혹시 아직 안됐나요?”
“아뇨. 다 됐어요. 미리 해놓길 잘했네요. 잠깐만요.”
현태는 오전에 만들어 놓았던 장미 꽃다발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줄기 아래쪽 절단면을 보존 약품 속에 담가 두었던 덕에 방금 꺾기라도 한 것처럼 탱글탱글 신선해 보였다. 현태는 물기를 닦아내고 리본 장식을 다시 한 번 더 바로 잡은 뒤 꽃다발을 청년에게 건네었다. 청년은 어린애기라도 안 듯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꽃다발을 받아들더니 어물거리며 물었다.
“저기, 역시 여자들은 꽃을 좋아하겠죠?”
“그럼요. 꽃 싫어하는 여자는 없잖아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늘이 두 쪽 날 만큼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꽃다발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녀가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가 온전히 그 꽃다발에 달려있다는 듯이 말이다. 현태는 연신 마른 입술을 핥는 청년 앞에서 싱거운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상투적인 인생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꽃다발을 샅샅이 살펴본 청년은 만족했는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예쁘네요.”
그 말에 현태는 자신이 만든 꽃다발을 새삼스럽게 다시 바라보았다. 물론 그가 만든 꽃다발은 누구라도 인정할 만큼 예뻤다. 하지만 정작 현태 본인은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예쁘다’라고 쓰인 글자를 ‘예쁘다’라고 읽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글씨를 안다면 누구나 ‘예쁘다’라고 쓰고, 읽고, 또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붉은색 장미 꽃다발도 그런 합의된 기호에 불과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