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45)

by 곡도




“한 번 생각이나 해보세요. 제가 뭐 돈을 보태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저희 집에 들어와서 같이 살자는 건데.”

“아유, 그만하라니까. 진짜 오늘따라 왜 이래. 사리분별이 분명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질척거리기도 하나 봐.”

현태는 버럭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저렇게 질색할 일이 무엇인가. 감격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의 성의는 알아줘야 하지 않나.

“아니, 같이 사는 게 뭐가 문제예요? 생활비는 내가 다 내겠다는 데.”

현태가 언성을 높이자 그녀는 입가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입꼬리가 내려가는 모양이 지극히 기계적이어서 현태는 그제서야 마담이 정말 웃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담은 피던 담배를 재떨이에 뭉개고는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가늘고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입술을 늘어뜨리고 눈살을 찌푸린 표정은 그녀를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

“그러는 현태씨는 왜 나하고 같이 살고 싶은데?”

왜냐고? 그도 이렇다 하고 떡하니 내놓을 만한 이유는 없었다. 그는 맥이 빠져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냥, 같이 살면 좋잖아요. 서로 의지도 되고.”

그녀가 다시 성마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난 자기한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는데?”

현태는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은 분명 친절한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는데 어째서 이토록 매몰찬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며 마담은 다시 가슴 깊숙이 담배를 빨아들였다. 어찌나 깊이 빨아들였는지 그녀가 미처 내뿜기도 전에 그녀의 입과 콧구멍에서 연기가 스물스물 새어 나왔다. 그녀는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그렇게 앞뒤 분간이 안 돼서 어떻게? 먹여 살리겠다고 하면 내가 어머나, 고마워요, 잘할게요, 할 줄 알았나봐? 이거 봐, 현태씨.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이 짓으로 굴러먹으면서 이런 얘기 몇 번이나 들어봤을 것 같아? 현태씨가 처음일 것 같아? 나 같은 여자하고 같이 살겠다는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싶지? 그런데 말이야, 나하고 배꼽 맞추는 놈들 중 열 명에 두세 명은 나한테 같이 살자고 조른다는 거 모르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거야.”

그리곤 그녀는 혼잣말로 쌍소리를 곱씹으며 재떨이에 침을 탁 뱉었다.

“나하고 같이 살겠다는 남자들은 딱 두 종류야. 여자를 손아귀에 쥐고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거나, 불쌍한 여자를 구원해 주고 싶거나. 그런데 웃기는 게 그 두 가지가 실은 같은 얘기란 말이야. 술집 여자가 쉬워 보이지? 만만하고, 속으로는 갈보라고 우습게 생각하지. 그러면서 그딴 건 상관없는 척, 자신이 깨인 남자인 것처럼, 제법 좋은 사람인 것처럼, 진짜 남자다운 것처럼 스스로 거들먹거리고 싶은 거지. 나도 어릴 때는 그걸 몰라서 여러 번 뒤통수를 맞았지만, 겪어보니 결국에는 다 똑같은 인간들이더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염불처럼 나불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펄쩍 뛰는 거야. 자기는 더 나은 여자를 만날 자격이 있다나. 새롭게 시작해 보고 싶은 기분에 만만하게 주물럭거리다가 변덕이 식으면 쉽게 내던져버리는 거지. 그리고는 하나 같이 자신은 할 만큼 했다고, 어쨌거나 자신은 기회를 줬다고 우쭐댄다니까.”

그는 마담이 긴 넋두리를 늘어놓는 동안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감탄하며 듣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말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그는 그녀가 쉬워 보였고 그래서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오래전 정민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정민은 그에게, 성기와 성기가 합쳐진다고 해서, 그 짓을 수 없이 반복한다고 해서, 그 어떤 것도 얇아지거나 무디어지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호되게 교훈을 얻었으면서도 그는 또다시 헛방아를 찧어 버린 것이다.

“아니, 나는 그저, 마담이, 수철이 얘기에 울길래,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응석을 부렸다.

“뭐어?”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싶어 마담은 눈살을 있는 데로 치켜올렸다.

“수철이가 자살한 얘기에 울어준 건 마담뿐이었어요.”

마담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려고 입을 쩍 벌렸다가 억지로 참아 넘겼다. 아무래도 죽은 사람 얘기에 웃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야, 현태씨, 진짜 이런 사람이었어? 애영감인 줄 알았더니 속은 완전히 어린애네. 내가 뭐 수철씨 죽음에 가슴이 막 찢어져서 울었겠어? 나는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하루에 몇 번씩 우는 년이야. 습관이라고.”

현태는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온몸의 기운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오마담과 같이 살고자 했던 마음도 싹 가시고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했던 건지, 그녀에게 무엇을 바랐던 건지도 가물거렸다. 관계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확실할 때에만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애매해지면 관계도 애매해지고, 그럼 상대가 누구인지도 애매해지고 만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담배를 끄고 파란색 원피스를 탈탈 털어 입기 시작한 마담에게 그가 물었다.

“뭘?”

“마담한테는 내가 어떻게 보여요?”

“뭐?”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여요?”

마담은 흉하게 입술을 찌푸렸다. 이 질문도 이미 수백 번쯤 받아본 걸까?

“나 같은 여자 찾는 남자들이야 뻔한 거 아냐? 한 판 뜨기는 해야겠고, 마땅한 여자는 없고, 다 그렇지, 뭐. 지랄 웃겨. 현태씨 지금 뭐 창녀한테 와서 자아라도 찾니? 옛날 3류 영화처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시야가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더 현명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소한 그녀에게는 자기 자신을 창녀라고 부를 수 있는 대범함이 있었다.

“오늘 거 안 줘?”

멍하니 앉아있는 현태에게 어느새 옷을 다 차려입은 마담이 머리에 커다란 핀을 꽂으며 재촉했다. 현태는 안주머니에서 돈을 넣어둔 봉투를 꺼내 주었다. 딱히 비참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저 온몸의 관절 마디가 쑤셔왔다. 마담은 봉투를 핸드백에 넣다 말고 민첩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삐지거나 한 건 아니지? 남자가 속 좁게 그러면 안 된다? 내가 말은 좀 심하게 했지만 다 현태씨를 위한 거니까. 마음 풀고 다음 주에 또 연락해. 알았지?”

그리고 그녀는 핑그르르 웃으며 천천히 방을 빠져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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