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식사를 끝내고 거실에서 커피를 마셨다. 잠시 부드러웠던 분위기가 부산스럽게 식탁을 치우고 커피를 끓이는 동안 다시 서먹해졌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서는 커피 마시는 후루룩 소리만 번갈아 들려왔다. 최대한 천천히 마시던 커피도 어느새 바닥을 들어내자 현태는 슬슬 조바심이 났다. 결국 무슨 용건이시냐고 대놓고 물어보려는 데 병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라 현태는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내가 그 집을 나왔다.”
“네?”
“그 집을 나왔어.”
“나오다뇨?”
병규는 말이 없었다.
“그 여자하고 헤어지셨다는 말이에요?”
“그래. 헤어졌다.”
“아니, 왜요?”
“원래 그 여자는 질이 좋지 않았어. 바탕은 어쩔 수 없는 거야. 결국에는 자기 잇속만 챙기더라.”
병규는 현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그래서, 내가, 지금 갈 데가 없다.”
현태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무언가 목 뒤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느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 2주 전에 그 집을 나와서 지금껏 친구네 집에 있었어. 그런데 거기도 더 있을 수가 없어서…….”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시려구요.”
병규의 말을 가로막으며 현태가 사무적으로 물었다. 병규는 입을 꾹 다물고 말없이 발가락만 꼬물락 거렸다. 현태는 기가 차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뻔뻔하고 비열한데다가 비겁하기까지 한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여기 계시겠다구요?”
치를 떨던 현태는 결국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고 말았다.
“글쎄, 그게, 내가 갈 데가 없다.”
병규가 맞잡은 두 손을 위 아래로 흔들며 되풀이해서 말했다. 현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돼요.”
병규의 망연한 얼굴을 향해 현태는 거침없이 말했다.
“여긴 안된다구요. 다른 곳을 알아보세요.”
이제 와서 자신의 집에 얹혀 살 생각을 하다니 소름이 끼쳤다. 온갖 야비한 욕지거리가 우박처럼 그의 머리를 두들겨댔다. 하지만 병규는 병규대로 현태의 이런 매몰찬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 하지만 어떻게 예상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 울그락불그락 얼굴이 붉어졌다. 현태가 병규를 잘 모르는 것만큼이나 병규 역시 현태를 잘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난 갈 곳이 없는데.”
병규가 갈라진 목소리로 또 한 번 외쳤다.
“다시 그 여자 집으로 돌아가요.”
“우린, 완전히 끝났다니까. 그 여자도 다른 곳으로 이사 갔어.”
“그럼 집을 얻으세요.”
“내가 돈이 있어야지.”
“아니, 돈도 안 모아 놓으셨어요?”
“너도 알다시피 4년 전에 네 엄마한테 다 주고 나왔잖냐. 솔직히 그 때 내가 얼마라도 챙겼으면 지금 내 처지가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거다.”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모든 걸 내팽개치고 나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병규는 생색을 내고 있었다.
“다 아버지가 저지른 일이잖아요.”
“물론 내가 잘못하긴 했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냐.”
무엇보다 현태를 화나게 하는 건 부모로써 자식의 이해와 동정을 바라는 병규의 노골적인 태연함이었다. 자식이기 때문에 오히려 부모가 더 역겨워지기도 한다는 걸, 부모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더 역겨운 인간일 수도 있다는 걸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지금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병규를 쫓아내는 일이 시급했다. 이곳은 현태에게도 유일한 안식처였다.
“하여간 여기는 안 돼요. 방도 하나밖에 없구요.”
“그냥, 나는 거실에서 지내마. 응? 난 상관없다. 하여간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죽은 듯이 있을게.”
“안 돼요.”
“현태야.”
“안된다니까요. 내일 고시원 알아봐 드릴 테니까 거기서 지내세요. 제가 고시원 비용은 댈게요.”
“고시원? 고시원이면, 그 쪽방 같은 데 말이냐?”
“무슨 쪽방이에요. 요새는 좋은 고시원도 많아요.”
현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씩씩 거리며 거친 숨을 내뿜더니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왜 고시원을 가냐? 내가 왜! 멀쩡하게 아들 새끼가 있는데, 내가 왜 고시원을 가.”
현태는 불시에 귓방망이를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얼떨떨한 얼굴로 병규를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분노로 가득 찼던 현태의 마음도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대체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일까. 아니, 오직 억울함만이 사람이 가진 유일한 감정인지도 모른다. 기쁜 억울함, 화난 억울함, 슬픈 억울함, 즐거운 억울함. 모든 인간성의 근본. 그는 씩씩거리는 병규를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고시원이 싫으면 어디 딴 데로 가시던지요.”
병규는 우그러진 얼굴로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냐. 삼십년을 살겠냐, 사십년을 살겠냐. 내가 죽은 후에 땅을 치고 후회하려고 이러냐? 두고 봐라. 내가 죽고 나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아무 소용없다고. 그래, 내가 그냥 콱 죽어 버려야지. 어디 가서 뒤져버려야 해. 그래야 지가 얼마나 망덕한 놈인지 알지. 그래야 네 놈이 정신을 차린단 말이야.”
현태는 역한 오물 냄새라도 맡은 것처럼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병규를 내버려둔 채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 밖에서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화가 난 병규가 물을 마시기 위해 그릇을 뒤지는 모양이었다. 현태는 침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여름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밤공기는 아직 후덥지근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노란 의자에 앉아 창틀에 머리를 기댔다. 병규의 마지막 말이 달구어진 아스팔트 냄새와 함께 끈적하게 머릿속에 달라붙었다.
‘내가 죽고 나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아무 소용없다고. 그래, 내가 그냥 콱 죽어 버려야지. 어디 가서 뒤져버려야 해. 그래야 지가 얼마나 망덕한 놈인지 알지. 그래야 네 놈이 정신을 차린단 말이야.’
수철의 일을 겪고도 자신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만약 거기에 일말의 후회나 안타까움이 있었다면 현태는 오늘 밤 병규에게 좀 더 친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철이 죽었다고 해도, 또 누가 죽어 나간다 해도, 견딜 수 없는 건 여전히 견딜 수 없었고 결정되어야 하는 건 여전히 결정되어야 했다. 때로는 한 사람의 목숨이 역사의 흐름마저 바꾼다지만 실상은 산사람의 작은 습관 하나마저 바꾸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내가 죽고 나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아무 소용없다고.’ 병규의 말은 협박이 아니라 저주였다. 그것은 수철이 현태에게 보내는 저주이기도 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저주. 현태는 창 밖으로 길게 고개를 내밀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