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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Oct 03. 2024

책 빚 바람 그리고 새로운 계절

<월간 오글오글 : 10월호 독서의 계절>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10월호 주제는 '독서의 계절' 입니다.


서재에 들어가니 책장에 꽂힌 책들이 빚쟁이같이 늘어서있다. 왜 사놓기만 하고 열어보지 않냐고 아우성이다. 알지도 못하는 생물 용어가 가득한 뇌과학 책과 현대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샀던, 이름도 발음하기 힘든 브뤼노 라투르의 책 따위가 그렇다. 꽂혀서 사면 항상 이모양이다. 공부하고픈 바람이 훅 하고 불면 홀린 듯이 책을 사지만 이내 그 바람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책과 먼지만 남는다.


그렇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책을 읽을만한 바람과 춥지도 덥지도 않은 마음의 온도가 세팅되어야 한다. 마음에 비가 내려서도 안 된다. 활자가 쓸려내려 가서 읽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너무 기뻐서 쨍쨍한 마음이어서도 안 된다. 그럴 땐 사람들과 술을 마시지 책을 읽진 않는다.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을 맞이하기란 이렇게 어렵다.



처음 그 계절을 맞이했을 땐 오 년간 사천권을 읽었다. 오디세이, 일리아드, 순수 이성 비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같은 책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지만 땡이다. 유리가면, H2, 슬램덩크, 바사라, 월광천녀, 엔젤전설..이름만 들어도 흥미진진한 이 책들, '만화책'을 읽었다. 열여덟 살에 자주 가던 만화 대여점인 코믹 파라다이스에서 총 대여권수 4천 권이라는 숫자를 갱신하고 대여순위 2위가 되었다. 1위가 아니어서 아쉽진 않았다. 1위는 두 명의 자매가 함께 빌렸기에 내가 그 천국에서 실질적인 일인자였다. 그때는 만화책의 첫 장만 펼쳐봐도 내용이 재미가 있을지 없을지를 파악할 수 있었고, 작가 이름만 대도 어떤 작품을 썼는지를 줄줄이 나열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만화 천국을 빠져나와 메인스트리트의 뒷골목으로 가면 우리 집이 있었다. 그리 편안한 곳은 아니었다. 골목 끝집 특유의 습함으로 곰팡이와 바퀴벌레는 원래 있던 벽지같이 존재했고 본 적 없는 천장의 쥐는 가끔씩 뛰어다니며 자신이 반려 동물임을 인정하라고 우겨댔다. 그 친구들은 그래도 괜찮았다. 그저 여러 가지 능력이 있던 한 사람이 불편했다. 그는 가끔씩 술을 마시면 술잔과 밥상이 중력을 이기고 공중에 뜨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두 명의 딸을 낳은 엄마의 등본에 셋째 딸의 이름이 적히게 하는 기적도 행했다. 나를 보며 삼국지 유비의 아들인 유선을 떠올렸다. 언젠가 나를 은행에서 떨어뜨렸던 기억과 조자룡 앞에서 유선을 던졌던 장면을 오버랩시키며 언니보다 낮은 나의 지능을 안타까워하며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런 나에게 만화책은 유일한 숨 쉴 구멍이자 시궁창 같은 현실을 잊을 수 있는 도피처였다. 만화책을 읽을 땐 내가 잠시라도 멋진 누군가가 될 수 있었다. 스바루처럼 발레에 미치거나 마야처럼 홍천녀 대사를 읊어대거나 켄신처럼 검을 거꾸로 들고 최고의 무사가 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게 해 줬다. 책은, 만화책은 나에게 유일한 탈출구였다.


도피로서의 독서는 대학을 가면서 끝이 났다. 더 이상 나를 갉아먹던 곰팡이와 자존감 도둑이 있는 곳에 가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책을 읽지 않기 시작했다. 독서의 계절은 요원했다. 계절은 순환이 본질임에도 나에게 책을 보고픈 바람은 불지 않았다. 날이 좋아서 날이 나빠서 그렇게 오랫동안 책을 손에서 놓았다.




그러다 직업을 가졌다. 일을 할 때마다 어딘가가 불안하고 부끄러웠다. 제대로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잘못되고 있다는 죄책감과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마음을 찌르고 있었다. 무엇이라도 했어야 했기에 수혈하듯 책을 펼쳤다. 책을 읽을 땐 수치심과 불안이 사라졌다. 책을 깔짝거리며 읽어대니 누군가의 추천으로 도서 팟캐스트(이동진의 빨간 책방)를 듣기 시작했고 다독가들의 북스타그램도 찾아보게 되었다. 어느새 하나의 책을 같이 읽고 얘기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겨 온라인, 오프라인 독서모임도 참여했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책을 읽었다. 이젠 그림이 아니라 활자가 적힌 책이었다. 책을 읽다 보니 내가 제대로 알아야 하는 건 세상이 아니었다. 나였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바라는지를 이해하고 바라봐야 했다.


그렇게 두 번째 독서의 계절을 맞이했다. 무언가에서 도망가지 않고, 나를 부정하지 않는 '대면으로서의 독서'가 시작됐다. 책을 읽는 나와, 나의 시간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더 이상 죄책감도 불안함도 수치심도 없이.


빚쟁이같이 늘어선 책장의 책들에겐 미안한 채로 또 오늘 다른 빚쟁이가 들어섰다. 육아책의 바람이 불어 육아 타이틀이 붙은 책들이 들어오고, 소설책의 바람이 불어 읽지도 않을 서사들이 웅크려져 있다. 언젠가 날이 좋아서, 날이 궂어서 그리고 바람이 불면 새 계절을 맞이하듯 먼지를 털어내고 쌓인 빚을 청산하겠지. 적당한 온도와 햇볕이 내리쬐는 오늘은 책 읽기 좋은 날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내겐 새로운 독서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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