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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인영 Sep 05. 2022

생각의 토끼굴

Ep 01: 치킨과 양배추 클램 차우더 수프

치킨, 양배추, 감자, 푸실리, 바지락까지 듬뿍 들어간 수프는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MBTI에 농락당하고 싶진 않지만, INFJ의 핵심 키워드가 '생각'과 '공상(더불어 망상)'이다.

종종 생각이 불쑥 솟아오를 때면 특히, 그 생각이란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그날은 '생각의 몽둥이질'에 흠씬 두들겨 맞는 날이다. 작년 말부터 올해 7월 말까지 나는 생각 도둑의 행패와 몽둥이질로 자주 곤죽이 되곤 했었다. 생각의 토끼굴에서 탈출하고 싶어 운동 횟수를 더 늘려 몸을 혹사시켜보기도 했고, 집중할 거리를 찾기 위해 애써 루틴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나답지 않게 일부러 사람을 만나는 약속을 많이 잡아보기도 했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 뒤엔 항상 엄청난 에너지 고갈과 몸살이 뒤따랐다.


생각의 핵심 죄질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여기까지 오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애초에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해결을 원하는 것'과 '관계 속의 허무'였다. 답도 없는 문제들에 생각이 뱀 똬리를 트느라 현실의 순간에 자주 집중하지 못했고, 식욕마저 떨어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런 나를 옆에서 수개월간 보던 엄마는 드디어 인내심이 폭발했는지 우울증 테스트를 권유했고, 나는 거의 600문항에 가까운 질문에 답변을 하고 나서야 내 상태를 진단받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난 멀쩡했다. 단지 에너지 레벨이 현저히 낮을 뿐, 우울증 증상을 가진 내 또래 평균 여성들의 수치와 나의 그래프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결국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 '생각의 토끼굴에 자주 빠지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매우 심플한 답변을 얻었지만, 사실 생각은 어떤 중독보다 끈질기다.

형체도 한계도 없으며, 타인의 눈엔 보이지도 않기에 나에게 찰싹 들러붙어 귀신같이 숨어있다가

언제든   어느 곳에서든 스며들  있다.

요즘은 생각에게 '항복'한 상태다. 멈출 수 없다는 걸 인정했으며, 나의 (이럴 땐 전혀) 쓸모없는 조금 좋은 기억력과 빠른 정보 수용력이 더더욱 생각의 몸집을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억지로 새로운 것도, 몸을 더 지치게 하는 것도 하지 말고 하던걸 꾸준히 해보기로 했다.

그래도 몇 년 간 내가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애정 해온 시간이었던, '음식을 만드는 것'.


나는 마음에너지가 떨어질 때면 늘 직접 뭔가를 해 먹고 싶었던 것 같다.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는 동안에는 적어도 생각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만큼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그 과정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우울증도 아니고 애초에 그만두게도 할 수 없는 거라면 스스로를 격려하는 수밖에 없다.

이번 요리는 이런 나의 마음을 엄마와 솔직하게 나누며, 엄마와 나를 위로하는 그런 요리였다.


 


기본적인 클램차우더 수프에 미리 익힌 닭고기와 양배추, 감자, 푸실리를 넣어 든든하게 먹는 한끼 요리다.

치아바타나 르방 같은 빵을 살짝 구워 수프에 푹 적셔 먹어도 좋다.

수프 맛이 진하므로 레몬차나 유자차를 함께 곁들이면 부드러움과 상큼함의 밸런스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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