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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미 Aug 05. 2021

많이 넘어져 보는 인생

   앞에서 몇 번을 고백했듯이 난 운동을 못한다. 그 정도가 꽤 심한 편인데, 특히나 민첩성, 순발력에서 월등히 떨어져 달리기에선 정말 형편없는 결과를 내곤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담당 과목이 체육이었는데, 풍채도 좋으시고 성격도 시원시원하셔서 인기가 많 여자 선생님이셨다. 그러던 어느 체육 시간, 100m 달리기 수행평가를 하는 날이었다. 나는 비록 체육 열등생이지만 최대한 좋은 성적을 내서 선생님의 관심을 받고 싶었다.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그러나 내 의지와는 달리 결과는 처참했다. 킥킥 웃는 아이들 사이로 열 받은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달리기를 끝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선생님은 수행평가가 장난으로 보이냐며 벌컥 화를 내셨다. 난 진짜 열심히 달렸다고 말해도 선생님은 믿지 않으셨고 결국 기합까지 주셨다. 아마 그때 내 기록이 30초를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으로선 선생님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나,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억울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씩씩거리며 엎드려뻗쳐를 했다.


   그 이후 20여 년간 나는 운동이라면 담을 쌓았다. '열심히 해봤자 난 안돼'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선생님이 내민 스케이트를 보자 운동에 대한 두려움이 슬그머니 사라진 거다. 날렵한 칼날과 매끈한 바디.  일일 체험자를 위한 대여 스케이트의 투박함에 대비되는 전문가용 스케이트가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똑같은 대여용 스케이트를 신은 사람들 가운데, 전문가용 헬멧과 스케이트를 착용하니 내가 선수가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절대반지를 낀 골룸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얼음판 위를 씽씽 가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도 저리 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호기롭게 얼음판에 한 걸음을 내디뎠다. 새 스케이트를 신은 6살, 8살 아들 둘도 뛰어들 듯 얼음판으로 나갔다.


- 으악!


   분명 내 다리인데, 마음대로 안 됐다. 마음은 앞으로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바람 인형처럼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역시나 마법의 스케이트는 없었다. 우리 셋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 명이 넘어지면 옆에서 그 사람을 일으켜주다가 넘어지고, 그럼 일어난 사람이 또 넘어졌다. 선생님이 우리를 구해주러 오기 전까지 엉망진창 쇼만 끝도 없이 선보였다.      



  가장 처음 배운 것은 걷기였다. 나는 아들 둘과 한 줄로 열을 맞춰 한발, 한발 얼음 위를 걸었다. 마치 처음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처럼 발바닥에 힘을 주어 조심스레 내디뎠다. 걷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이었다니. 바닥이 땅에서 얼음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내 평생 해온 사소한 움직임조차 낯설어졌다. 30m 정도 되는 짧은 코스임에도 여러 번 휘청거리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멋진 전문가용 스케이트를 신고 이리 빌빌거리니 왠지 더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들이 비웃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더 움츠러졌다.


- 선생님, 전 아무래도 운동이랑 안 맞나 봐요.


  선생님에게 의기소침하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빙긋 웃으셨다.


-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잘하고 계세요.

- 제가요?

- 많이 넘어져 봐야 잘 탈 수 있거든요.  


  선생님의 지나가듯 하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그래, 넘어질 수 있는 거. 넘어지면 훌훌 털고 일어나서 다시 타면 그만이다. 미끄러운 빙판 위에서 하는 운동이니 넘어지는 건 당연한 건데 왜 그리 신경 쓰고 지레 겁을 먹은 걸까.


  달리기도 마찬가지 일 터. 그냥 달리고 싶은 대로 달리면 된다. 내가 올림픽에 나갈 것도 아닌데 빨리 달릴 필요가 뭐가 있다고, 몇 번 해보지도 않고 포기해버린 걸까. 뛸 수 있을 만큼 달리고, 그 가운데 즐거움을 느끼면 되는 거였다. 더는 내 열등한 운동실력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마음먹자 딱딱하게 긴장해있던 온몸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느낌이 들었다.

      

  나와 아들 둘은 맘 놓고 실컷 넘어졌다. 끝날 때쯤엔 온 옷이 다 젖어있었다. 하도 넘어지다 보니 좀 덜 아프게 넘어지는 방법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넘어질 수 있고, 느리게 달릴 수 있다는 너그러움을 나에게 조금 더 베풀어줘야지. 그래서 선수로 변신시켜주는 마법의 스케이트화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즐길 수 있는 신체로 가꿔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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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스케이트를 타게 됐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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