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 가을의 시작 즈음
매년 우리는 미자씨를 만난다.
8월 말에 예약했던 미자씨는 볕 좋은 날 우리 집에 도착했다.
가을에 담가.. 100일을 숙성시켜
겨우내 따끈하게 우리의 몸을 달궈주고
이듬해 여름에는 찰랑거리는 얼음과 함께하는
'오! 미자씨!'
희한하게도 나이 든 주부가 되니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이 하나씩 생기곤 한다.
그중 하나가
가을 오미자를 담그는 일.
새콤달콤한 오미자를 차로 마시는 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하지만 냉장고 맨 위칸에
빨간 오미자청이 없으면 왠지 불안하고 허전하다.
올해는 이래저래 먹고사는 일이 힘들어져 딱 절반만 하기로 했다.
'밥만 먹고살 순 없으니... '
라는 생각에...
재미있게 일하기
도착한 박스를 열어보니.
과실들이 너무나도 예쁜 새~빨간색을 뽐내며 통통거리고 있었다.
미리 닦아놓은 반짝이는 스텐 바구니에 오미자를 쏟아부으니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어느샌가 집안에 있던 아이들이 쏜살같이 나왔다.
늘 그렇듯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은 끝이 없다.
가르치고 챙기고 치우고 채근하고...
하지만
부럽게도 아이들은 어른과 달리 일을 놀이처럼 하는 즐거운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가을 하늘 아래 마지막 물놀이를 하듯 열심히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고 있다.
빨간 오미자를 보고 신이 난 딸은 연신 오미자를 건져내더니
어느새 자신이 그 바구니로 들어가려 한다.
아이의 옷은 이미 젖어 있었고, 얼굴은 미자씨보다 발그레 발그레... 흥이 나있다.
그렇게 흥이 나니..
오미자 오미자 일이 즐겁다.
새빨간 거짓말
여름내 태풍과 장마로 몸고생 했을 미자씨를
마사지하듯 흐르는 물에 살랑살랑 흔들어주었다.
흘러가는 물과 함께 그동안 힘들었을 농부의 한숨도
함께 씻겨가길 잠시 바라본다.
그대로의 것에 빠져..
꽃이 주는 그대로의 향기와,
구름이 그려주는 자연스러운 형태,
바람이 불어주는 적당한 습기.
그리고 미자씨의 새빨간 유혹..
미자씨의 유혹에 빠진 아이들은 겁 없이 새빨갛고 탐스런 알을 하나씩 집어 먹었다.
'아... 시어...'
오미자의 새빨간 거짓말을 느껴본 아이들은 듣지 않아도
이제 왜 오미자라 부르는지 금세 알아차렸을 것이다.
손끝에 매달린 오미자
지난여름 아이들과 함께 물들인 봉숭아가 손톱 끝에 물들어 있다.
봉숭아 손톱으로 오미자를 잡고 있는 아이가,
“엄마 내손에도 오미자가 있어~”
하며 손을 활짝 펴 보인다.
두어 달 사이에 봉숭아는 많이 사라져 있다.
계절이 빨리도 지나가는 것인지... 아이가 순식간에 크고 있는 것인지.
9살 아이의 조막만 한 손은 가지에서 떨어져 동동거리는 미자씨를 구출하고 있었다.
'여기 오미자처럼
우리 아이도 점점 영글고 탱글탱글 익어가겠지.'
하며 남은 오미자를 생각과 함께
하나하나 주어 내고 있다.
생오미자만큼 생생한 아이들
주섬주섬 히득히득
키득키득 촤악촤악
여기저기
볕 좋은 날 마당의 끝은 항상 물이다.
옷이 젖어야만 말없이 집으로 들어간다.
볕 아래 몸을 적시며 노는 아이들
볕 아래 몸을 말리는 미자씨
볕 아래 몸을 달구는 병들
볕 아래 기미를 내주고 다크서클을 거두고 싶은 여자.
오늘은 햇볕, 미자씨
그리고
아이들이 다 했다.
그리고 생생하지 못한 엄마.
달콤한
당분에 몸을
담그고픈
오늘
여기서
히읏!
photo by / hahee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