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에 대한 귀여운 영화 <플립. 2010>. 새로 이사 온 소년 브라이스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7살 줄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소년에게 직진하지만 그는 소녀의 저돌적인 애정공세가 부담스러워 피하기만 하다가 어느 순간 소녀의 매력을 알아차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새 flipped(뒤집히다)이 된다. 소녀와 소년의 사랑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그려내던 이 영화에서 마음이 찡했던 장면이 있다.
어린 줄리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사랑했던 거대한 플라타너스 나무가 베어지고 밑동만 남아버렸을 때 그녀의 상실감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는 플라타너스 나무를 그려주며 이런 말을 한다. “그건 그냥 나무가 아니었었지. 나는 네가 그 나무 위에서의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상실감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인데 줄리의 아버지가 딸에게 전한 위로는 진심이 가득 담긴 것이어서 영화 속 장면이었지만 부러울 지경이었다.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베어져 나간 데는 미치지 못하지만 집에서 키우는 식물이 죽으면 우울하고,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반짝 보고 봄을 맞이하기 전에 시드는 게 보통이라는 포인세티아지만 세 번의 겨울을 보낸 내 포인세티아가 갑자기 죽고 나서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 물 주기가 조금 늦었을 뿐인데, 어쩜 그렇게 맥없이 죽을 수 있을까. 어찌나 아쉬운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직도 화분을 정리하지 못했고, 물꽂이에 성공한 가지 하나도 너무 소중해서 잘못될까 걱정되어 화분에 옮겨 심지 못하고 있다.
알고 보니 사 온 식물이 1년생 혹은 2년생이어서 얼마 못 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고도로 조작된 원예품종 중에는 첫해에만 꽃이 예쁘게 피도록 하거나 번식을 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기도 하다. 이것은 계속해서 식물을 판매하기 위한 원예품종 개발자의 설계다. 식물의 죽음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식물이 가진 원래 특성 때문이거나 혹은 식물을 상품으로 판매하기 위한 전략이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식물이 자연 상태처럼 건강하게 자랄 수 없는 부적절한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갈 수 있으니 식물 반려인들이 식물의 죽음을 섣불리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식물학자 신혜우의 『이웃집 식물상담소』에서
옛날 전자제품의 수명에 비해 오히려 최신 전자제품의 수명이 짧아진 것처럼 원예업자들도 먹고살기 위한 자구책을 쓰고 있을 뿐이었구나. 애먼 죄책감을 가지는 식집사들 생각에 원예업자들이 조금 괘씸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들도 먹고살아야 하니 별 수 없지 싶고,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럼 그렇지, 내 잘못이 아니었어!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긴 하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식집사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공부가 수반되어야 한다. 키우는 식물이 원래 어디서 어떻게 자라는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알아야 수발드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가급적 예쁘다고 덜컥 식물을 들이기보다 사전에 생태를 알고 우리 집에서 잘 자랄 수 있는 식물인지 파악하고 들이는 것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