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봄, 여름을 하릴없이 흘려보낸 어른을 위한 동화
외출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나가려는데 뭐가 푸드덕 떨어지는 것 같았다. 금세 안 보이길래 뭔가 착각한 줄 알고 자전거 페달을 밟고 달리는데 앞바퀴에 뭔가 연둣빛 물체가 함께 돌아가는 게 보였다. 헉! 커다란 사마귀가 앞바퀴에 매달려 있는데 자전거가 나아가는데도 떨어져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사마귀를 쫓아보려고 했는데도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바퀴 안쪽으로 들어가길래 기념사진 한 장 찰칵 찍고 볼일을 보러 갔다가 왔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사마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가 가늠해 봤더니 아마 초등학교 시절 곤충채집 하러 돌아다닐 때쯤이었던 것 같다. 유난히 반짝이고 고운 사마귀를 보는데 문득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이 떠올랐다.
1999년작이니 세상에, 벌써 24년 전 영화다.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의 거물 코미디언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혈이 낭자한 누아르 영화감독의 이미지가 강한 인물이다. 데뷔작 <그 남자 흉폭하다. 1989>, <하나-비. 1997>, <소나티네. 2000>, <자토이치. 2003> 등 잔인하고 강렬한 이미지의 영화들을 연출하면서 영화감독으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갔다. 피칠갑 영화 장인 기타노 다케시가 아역배우와 함께 로드무비 <기쿠지로의 여름>을 촬영했다니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아빠는 사고로 죽고, 엄마는 돈을 벌러 멀리 떠나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9살 소년 마사오는 여름방학이 되자 친구들은 모두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느라 떠나버려 외톨이가 된다. 마사오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고 우연히 52세 철부지 아저씨 기쿠지로와 동행을 하게 된다. 말이 없고 어른스러운 마사오와 달리 기쿠지로는 경륜장에서 돈을 날리고, 택시를 훔쳐 달아나거나, 히치하이킹을 하기 위해 장님 행세를 하는 등 온갖 양아치 짓을 다하는 한심한 어른이다.
영화 제목이 ‘마사오의 여름’이 아니고, 왜 ‘기쿠지로의 여름’일까 의문으로 시작했다가 어린이 마사오가 아니라 어른 기쿠지로의 성장영화라는 걸 깨달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영화의 대표 이미지인 커다란 토란잎을 쓰고 걷는 두 사람이 등장할 때쯤 이제 막 인생이 시작된 마사오보다 인생의 봄, 여름을 하릴없이 흘려보내고 가을에 접어든 중년의 기쿠지로의 축 처진 어깨가 더 짠하게 느껴진다.
Joe Hisaishi - Summer - YouTube
영화 전반에 흐르는 히사이시 조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곡과 늦여름의 이미지가 함께 떠오르는 <기쿠지로의 여름>을 지금 다시 보니 괜스레 가슴이 뭉클하고 먹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