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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ry Nov 17. 2022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학력고사 망쳤던 X세대 친구들에게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이 치러졌다. 수능이 끝나면 체감난도에 따라 ‘불수능’이니, ‘물수능’이니 평가가 나오지만 어떤 수험생들은 시험을 마친 해방감에 그동안 억눌러왔던 욕구 해소를 위한 작은 일탈을 꿈꾸기도 하고, 어떤 수험생들은 차분히 성공적인 대학 진학을 위한 전략을 짜기도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입시제도는 숱한 변화를 겪어오다가 1993년 대학 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되면서 30여 년간 그 근간을 유지하고 있다. 수능이 시작되기 직전 1981년부터 1992년까지 치러진 학력고사에서는 성적 발표와 함께 양극단의 기사들이 쏟아졌다.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했고, 잠은 6시간 이상 충분히 잤다.”는 전체수석들의 영광의 인터뷰가 방송과 신문에 소개되는 한편, 다른 한편에서는 시험을 망친 수험생들의 자살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영광의 주인공들이야, 지금도 대부분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테니 그들의 현재는 그리 궁금하지 않지만 너무 일찍 인생을 포기하고 저 세상으로 떠난 친구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모자의 실명까지 나와있는 옛날 신문


학력고사를 치른 지 어언 30여 년 언저리에 있는 X세대 친구들은 공감할 것이다. 살다 보니 학력고사로 인생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해도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꽤 여러 번 나타나고 그때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지금의 삶이 많이 달라졌다는 거다. 고작 스무 살 무렵에 인생에 모든 것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만약 그때 정해지는 인생이라면 그다지 재미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공부에 큰 뜻은커녕 작은 뜻도 없었기 때문에 고3 시절을 설렁설렁 보냈다. 나의 공부 수준이 어땠는가 하면 국어, 영어 영역은 특별한 공부가 없어도 제법 높은 성적을 획득했고, 수학과 그에 연관된 과목들은 초등학교 4학년쯤 인연을 다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는 찍기 신공을 발휘하는데 집중했다. 해서 학력고사의 수학은 내 운을 시험해보는 지표가 될 뿐이었다.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모아뒀지만 수험표까지 가지고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학력고사 당일은 아침밥도 든든히 먹고, 부모님의 막연한 응원을 뒤로하고 수험장으로 향했다. 1교시 국어, 국사 시험은 생각보다 쉬워서 술술 풀었고 나중에 답을 맞혀봤을 때도 상당히 잘 본 것으로 기억한다.  고작 4문제 뿐이지만 한문은 모두 정답행진... 문제는 2교시 수학과 사회과목이었다 그날 나는 난로 옆 따뜻한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그만 15분 정도 꿀잠을 자고 만 것이다! 내게 수학은 찍는 과목이라고 해도 학력고사 보다가 잠이 드는 게 말이 되나 말이다. 그나마 끝날 때까지 잠든 게 아닌 게 어딘가 싶은 마음도 들기도 해서 수학은 최선을 다해 찍었고, 사회과목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다. 결과를 먼저 말한다면 그날 수학의 운은 정답을 죄다 피하는데 끌어 쓰고야 말았고 그해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 


나는 양심적인 인간이라 대학에 떨어졌다고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수학은 망쳤지만, 국어와 영어, 다른 과목들은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았기에 내심 만족했다. 30여 년 전 학력고사를 본 순간, 다들 기억하는지 궁금하다. 대학 진학에 성공한 친구들은 홀가분하게 털어내서 기억도 함께 사라졌을 수도 있고, 시험을 망친 친구들은 후회와 아쉬움에 미련이 많이 남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날이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 큰 부분은 아니지 싶다. 살아오면서 대학 합격의 순간보다 훨씬 기쁜 날도 많았고, 대학 낙방의 순간보다 훨씬 슬픈 날도 많았다. 살아보니 인생은 생각보다 너무 짧지만, 재미있고, 알 수 없어서 더 기대가 되는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정말 엄청난 경쟁을 이겨내서 어렵게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으니 제 스스로 인생의 문을 닫아버리지는 말았으면 한다. 오늘을 망쳤다고 내일도 망치는 건 아니다. 지금은 바닥까지 가라앉지만 다른 날은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기회도 만들 수 있으니 오늘 폭망한 친구들아, 힘을 내자. 힘을 내서 오늘의 폭망을 웃으며 이야기할 날을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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