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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ry Nov 15. 2022

라디오 스타

제 목소리 들려요?

김기덕이라 하면 베를린, 칸, 베니스 국제영화제를 석권한 영화감독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X세대에게 김기덕은 MBC 라디오 “2시의 데이트”를 진행했던 DJ 김기덕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1973년부터 1995년까지 무려 22년간 2시의 데이트를 진행하며 MBC 라디오 명예의 전당 골든 마우스를 수상했고, 라디오 단일 프로그램 최장수 진행자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MBC 라디오의 간판으로 롱런 가도를 달리던 김기덕은 1995년 연예계 금품수수 비리와 연관된 의혹으로 불명예 하차를 했지만 1997년 김기덕의 골든 디스크로 복귀했다. <별에서 온 그대>, <사랑의 불시착>으로 최고의 드라마 작가로 우뚝 선 박지은 작가가 바로 김기덕의 골든 디스크의 막내작가로 데뷔한 것으로 알려졌다.  


TV가 등장했지만 90년대에도 라디오의 인기는 여전했고, 김기덕, 김광한, 이종환 등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막강한 팬덤이 존재하기도 했다. 태광 에로이카 대리점에서 매월 1일 배부하는 2시의 데이트 월간지는 청취자들이 보내온 신청곡 엽서를 집계해서 각종 차트를 만들어 공개했는데 1993년 8월호에서는 상반기 결산을 위해 13,150통의 엽서를 집계했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빡센 노동력 착취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13,150통의 엽서 중 847표를 득표한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l Always Love You”가 당당히 1위에 올랐고, 639표를 얻은 에릭 클랩턴의 “Tears In Heaven”이 2위,  588표를 받은 보이즈 투 맨의 “End of The Road”가 3위를 차지했다. X세대라면 다들 아는 그 노래들이다. 팝송만 결산했느냐, 아니다. 가요 부문도 있다. 569표를 얻은 신승훈의 “널 사랑하니까” 1위, 452표 ZAM의 “난 멈추지 않는다”가 441표 이무송의 “사는 게 뭔지”를 제치고 2위라는 사실도 매우 놀랍다. 

2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 1993년 8월호


낮 2시의 라디오스타가 김기덕이었다면 새벽 1시의 라디오 스타는 전영혁이었다. 이름도 매우 낯선 전영혁 기자가 진행했던 KBS “전영혁의 음악세계”는 1986년부터 2007년까지 무려 21년이나 이어진 심야방송의 시조새 격인 프로그램이었다. 이처럼 전설을 만들어낸 “전영혁의 음악세계”는 안타깝게도 진행자 전영혁의 학력위조 논란이 불거지면서 갑작스럽게 문을 닫게 되었고, 2011년 나얼이 DJ를 맡으며 부활하기도 했지만 2014년 폐지되고 말았다.  


방송 시간이 새벽 1시부터 2 시인 까닭에 그 시간이면 꿈나라에서 헤매던 X세대에게는 상당히 낯선 프로그램일 것이다.  DJ들의 현란한 멘트와 수다로 가득한 낮시간 프로그램들과 달리 “전영혁의 음악세계”는 몽환적인 시그널 음악[고음질 음원] 전영혁의 음악세계 시그널^^ The Art Of Noise - Moments in Love (Full Version)(한국인이 유독 좋아하는 노래|구독자님 신청곡) - YouTube과 어울리는 역시 몽환적인 DJ 전영혁의 목소리는 오프닝, 아티스트와 제목 소개 정도에서만 들을 수 있었고, 방송에서 듣기 힘든 엄청 긴 곡, 혹은 앨범 전체를 소개할 정도로 소수정예 청취자들을 위한 방송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영혁의 음악세계”에서 1996년 4월 방송 10주년 기념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내가 또 이걸 가지고 있다! 여기도 1995년 송년특집 애청자가 뽑은 애창곡 100선과 부문별 아티스트가 소개되어있는데 아트록 계열의 클라투, 카멜, 핑크 플로이드 등이 있지만 자세한 소개는 생략하는 게 나을 듯하다.

전영혁의 음악세계 1996년 4월 방송 10주년 기념호

  


요즘은 라디오도 팟캐스트로 듣거나 유튜브로 보기 때문에 같은 시간에 같은 방송을 듣는 사람들의 공감대가 희미해진 시대라 당시 라디오 스타의 존재감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SNS로 소통하는 시대지만 그때만 해도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신청곡 엽서를 보내는 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미디어 환경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가끔은 내가 듣는 방송을 좋아하는 그 사람도 듣고 있을까 하는 기대와 설레는 마음으로 엽서를 보냈던 투박한 아날로그 감성이 그리울 때도 있다. 지금은 관심 가는 사람의 SNS만 봐도 대충 어떻게 살고 있는지 편하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지만 SNS 속 그 사람이 진짜 그 사람인가 싶은 의문이 든다. 알고 싶은 사람이 있지만 도무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제한돼서 답답한 나머지 라디오 프로그램에 엽서를 보내면서 상상하던 그 간절한 마음이 그리워지는 건 이제는 돌아갈 수 없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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