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보러 갔다가 눈꽃 본 이야기

by 불은돼지

# Prologue


겁이 많을 수록 생존에 유리하다.


무리를 이룰수록 생존에 유리하다.


하지만 시도가 없으면 생존에 불리하다.


오롯히 혼자 해야 되는 것이다.


수많은 실패를 겪어도 생존에 성공할 수 있지만


시도가 없는 삶은 공허하다.


# '겁'을 내다


눈치가 빠른 나는 많이 비겁하다.


심지어 스스로에 대해서도 비겁하다.


'집에 가란 말 아냐' 라고 할 정도의 인사이동이 있었지만


당당한 것 보다는 비겁한 생존을 택했다.


지랄맞은 직장 생활이라도 무리를 떠나지 못한다.



설악산이 가고 싶어서 꾸준히도 운동했지만 여전히 너튜브나 블로그에서


중산리 VS 오색코스를 비교하는 컨텐츠를 보면서 몸을 사리고 있었다.


'올라 갈수 있을까?'


퍽이나 운동도 열심히 했지만 그래도 막상 올라가면 입에서는 비속어를 뱉을 것이


자명하다.


그래도 가기로 한다. 단풍이 얼마나 이쁠것이며 산장에서 몰래 마시는 소주는 얼마나


달 것이며 세상에서 떠나온 1박 2일은 또 얼마나 평온할른지 알고 있기 때문에



# 검은 능선에 오롯히 혼자서


국립공원에서도 힘들기로 첫번째를 다투는 오색코스,


검은 새벽 사이로 랜턴하나 손에 쥐고 올라간다. 10분도 안지나서 숨이차고 땀이 흐른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나자 비가 오기 시작한다.


"니가 용띠라서 산에 가면 비가 오거나 눈이 온다. 조심히 다니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내가 산에 간다고 하면 염려와 함께 용돈을 쥐어 주셨다.


올라가면서 참 할머니 생각이 유난히 많이 났다.


슬슬 젖기 시작하는 느낌이 나서 판초우의를 꺼내 입었다.


이 새벽에 이 산에 오롯히 나만 있다. 산은 힘들어도 이런 느낌이 참 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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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지고 고도가 높아지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눈비를 다 만나네. 이런 의외성도 나쁘지 않다.


갑작스런 상황을 함께 만나면 누군가는 등을 돌리고, 누군가는 얼굴을 마주보면서 온다.


'해결'이라는 공동의 숙제는 갈등을 만들지만 혼자 있을때는 '나'끼리 상의하면 된다.


'오늘 등산 재밌어지네'


센척을 하면서 무릎이 가슴에 닿도록 높은 경사를 하나씩 밟는다.


운동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다. 힘들지 않다. 할만 하다.


# 단풍 보러 왔는데 첫눈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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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제법 왔고 희운각 산장에서 1박한 등산객들도 몇분 보인다.


사진을 찍어 달라는 청에 응해 드렸더니 내 사진을 굳이 찍어 주신단다.


'혼자 오셨나 보네'


혼자 온 나보다 더 쓸쓸해 하며 한 말씀 하신다.


그림자처럼 스윽 미소 지어드리고는 대화를 붙이지 않는다.


정상풍경은 내리는 눈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찬란한 외설악 단풍도 멀리 속초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에게 일러둔다. 다 한때다. 눈도, 비도, 삶도.


그저 살아내기 급급한 인생에 이런 소소한 기억들을 디딤돌 삼아 매달려 보는 거다.



# 돌아간다는 것은 니가 있다는 것


첫눈을 보여 줄려고 영상통화를 했더니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이제 그만 내려와. 위험해~. 집에 와. 맛있는거 사줄께"


그래서 내려가기로 한다. 사실 아이젠을 챙겨왔으면 공룡능선을 거쳐 느릿느릿 오래도록


걷고 싶었다. 로잉머신 옆에 챙겨둔 아이젠을 담을 걸 하는 후회를 하기도 전에


돌아 오라는 말에 덜컥 그리움이 인다.



# Epilogue


그 언젠가 돈이 없어서 못 먹었던 맛집에서 비빔밥을 먹는다.


친구 새끼는 통화 중에


"근데 눈 말고 단풍 이런거 없어?"


"눈 왔다니까!! 미친놈아"


멀리 단풍이 보이길래 또 하나 찍어서 보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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