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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밑창

아직도 배운다- 글쓰기 동아리 '신발'

by Goldlee

"신발을 선물하면 그 사람이 떠난다."는 미신이 생각났다. 두 딸과 함께 새 신발을 사 신고 사진을 찍고 나니 든 생각이었다. 그냥 필요해서 산 신발일 뿐인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난 건지 그때는 알면서도 모른 체 했었다.


현관문을 열면 신발이 3열로 10칸이고 계절에 따른 신발이 또 그만큼 창고에 있다. 여름에 한 번 신을까 싶은 신발도 일단 꺼내 놓고 본다. 겨울에 한 번 신었던 신발이니 닦지도 않고 보관되어 있다. 이 많은 신발들은 용도가 있고 자리에 맞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생각에 진열해 둔 것이다. 운동화 중에서도 산책할 때 신는 밑창이 푹신한 것과 달리기 할 때 신는 조깅화, 테니스 칠 때 신는 테니스화, 등산할 때 신는 등산화, 축구할 때 축구화, 풋살 할 때는 또 풋살화 이런 식이다. 내 신발만 많은 게 아니다. 딸들의 신발도 많다. 신고 다니는 신발은 하나뿐인데 말이다.


또 신발을 사 준다. 필요하다고 하지도 않았다. 내 거 사는데 싼 맛에 또 하나 사준다. 사이즈가 몇인지 또 잊어버렸다. 그래서 또 물어본다. 기억이란 걸 하고 싶지 않았었다. 그저 하루가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 오늘 아침에 눈을 떴으니 오늘 밤에 눈을 감기만 하면 되었다. 내일 뭘 할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어제 뭘 했는지도 기억하기 싫었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싫었다. 사라지길 바랐던 것이다. 내 입으로 직접 그냥 가 버리라고 말할 용기도 없던 무책임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또 신발을 사 들였다. 그리고 신지도 않을 신발을 선물이라며 주었다. 제발 혼자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말로는 하지 못했다.


멋이란 걸 부리고 싶고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에 뒤지고 뒤져 찾은 명품 신발. 비싼 신발. 선물 받은 신발. 모임에 가는 나는 내 돈 주고는 사지도 않았을 선물 받은 신발을 몇 년째 보관만 하다가 꺼내어 신어 보고 없는 옷에 맞춰 입어 보려고 해 보지만 청바지만 입을 뿐이다. 어울리지도 않지만 난 있어 보이는 사람인 듯 착각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는 흘러넘쳤다. 평소차림에서 신발만 바꿨을 뿐인데 자신감이 솟아오른다. 다음 날 나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밑창이 떨어져 나간 비싼 신발을 던져 버렸다.

전 날 1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2차로 맥주를 마시다가 담배를 피우는 누군가를 따라나섰다가 담배를 하나 구걸해 피웠다. 끊었다고 말하면서 술 한 잔 마시면 당기는 데 참고 싶지는 않았다. 근데 삐딱하게 서서 담배를 피우는 건 보통 그렇지만 내 앞에 있던 사람이 더 삐딱한 것 같다. 나랑 특별히 대화를 한 것도 아니다. 근데 짝다리를 한 나보다 더 삐딱하게 보이는 모습이 보기 거슬렸지만 구걸하는 입장에서 뭐라 할 필요는 없었다. 다시 일행들과 섞여 얘기하는 중에 자꾸 의식되는 삐딱함이 신경 쓰였다. '내가 뭘 잘 못한 게 있는 건가?'라는 생각보다는 '왜 저러는 거지. 기분 나쁘네.'라며 나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지지 않겠다는 눈빛을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택시에서 내려서 걸어가는 중에 신발 밑창이 떨어져 나간 걸 알았다. '아! 언제 떨어져 나간 거지. 누가 보진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부끄럽고 민망했다. 그리고 신발을 준 사람을 욕했다. 받을 때는 고맙다고 웃으면서 세상에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추켜세웠는데 처음으로 받아 본 명품이고 비싸다는 신발을 그리 애지중지 모셔 놓고 신을 기회만 엿보다가 몇 년 만에 신고 나간 자리에서 밑창이 떨어져 나갔으니 내 자존심이 어떤 길가에 내 팽개쳐진 기분이 들었다. 신발이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내 모습을 누군가 봤을까? 혹시 담배 피울 때 삐딱하게 보던 그 사람이 보고 그랬던 것일까? 벌거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멋 부리고 있어 보이는 척 해도 안되는 거야. 난 던져 버렸다.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나를 삐딱하게 본 게 아니라 내가 삐딱할 수밖에 없던 내 떨어져 나간 나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등산화의 밑창이 떨어졌다. 등산을 시작하고 매주 가던 산을 교통사고 후 2년 만에 산에 오르는 중에 떨어져 나간 것이다. 완전 바닥이 통으로 분리된 것이다. 버리지 않고 주워서 가방에 넣고 절뚝거리며 걸으면서도 떨어져 나간 신발이 행여 아파할까 봐 조심스레 걸어 내려왔다. 떨어져 나갔지만 다시 붙여 쓰고 싶었다. 오랫동안 나와 함께 했던 그 모든 고통을 막아주던 신발을 관리하지 못한 게 미안했다. 그리고 더 이상 신발을 사 주지 않았다. 지금은 두 딸들에게 신발 대신 다른 선물을 하고 있다.


두 딸이 나를 떠나기를 바라는 맘에 사주던 신발을 보면서 자존심이란 걸 생각하며 허영덩어리라며 던져 버린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끼고 아껴 신으려고 했던 그 신발은 떨어져 나가고 떠나기를 바라는 신발은 악착같이 붙어 있었다. 깨달은 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삐딱한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삐딱한 것이고 진정 나의 것은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쳤다. 신발 따위가 떠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표지- 두딸들-이윤이우-바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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