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통영의 어느 술집에 앉아 이 글, 그러니까 공모에서 떨어지면 세상에서 소멸하고 말 ‘통영열전’의 초안을 잡는다. ‘빌레트의 부엌’이라 이름 붙은 이 가게 주인장은 문학을 가까이하는 여성이다. 통영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름 빌레트도 문학에서 가져온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빌레트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썼다. 모든 걸 가진 것처럼 보였으나 무엇도 가진 적 없는 베로니카가 죽기로 결심했으나 그마저 이루지 못하고 깨어난 곳이 이곳 빌레트 정신병원이었다. 그녀는 미친 사람들로 가득한 빌레트에서 삶을 배우고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문학을 이해하는 주인장의 책장엔 좋은 소설이 여럿 꽂혀 있다. 개중에서도 로맹 가리의 소설은 여러 권이 보여 관심을 끈다. <자기 앞의 生>은 로맹 가리의 작품 중에선, 굳이 따지자면 에밀 아자르라 해야겠으나 나는 로맹 가리를 더 좋아하므로, 무튼 한국에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다. 이 소설 역시 불행에서 시작한다. 기억이 맞다면 첫 문장은 엘리베이터 없이 철제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하는 7층짜리 건물에 사는 한 소년의 독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선명하다. ‘사랑해야만 한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이라곤 한 줄기도 없을 것 같은 이 공동주택에 사는 소년이 온 힘을 다해 사랑해야만 한다고 외치는 이야기를 저 위대한 로맹 가리가 썼다.
빌레트의 부엌에 앉아 주인장이 빚은 술을 마시고 정성스레 차린 밥을 먹는다. 테이블 앞에는 나뭇가지에 하얀 꽃이 핀 푸른 배경의 그림이 걸려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아몬드꽃 그림이다. 난 이 그림을 알기 전까지 아몬드가 나무에서 열리는지도 몰랐다. 그 만큼 낯선 나무이지만 이 작품 하나에 고흐의 마지막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안다. 이 그림 하나를 완성하고 고흐는 병원에 몇 달이나 입원했다. 그리고는 그 해를 끝내 나지 못했다.
고흐의 마지막 열망이 담긴 이 그림은 동생 테오와 그의 아내 조에게 전해졌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나 ‘빈센트’란 이름을 이어 받은 조카 빈센트 빌럼의 생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다. 쇠약해진 제 영혼을 한 데 모다 끌어 모아서는 제 조카에게 남길 작품에 담았다. 추운 겨울 가장 먼저 피는 아몬드꽃은 여전한 찬바람을 딛고 제 맨 얼굴을 캔버스 위에 톡하니 터뜨린다. 그 스스로도 생에 치여 괴로웠을 위대한 화가가 곧 태어날 어린 영혼에게 던지는 응원이 이와 같았다.
후에 빌럼은 네덜란드에 반 고흐 미술관을 창립했다. 삼촌의 그림을 한 점씩 팔아 떼돈을 버는 대신 한 곳에 모아 누구나 쉽게 대면할 수 있도록 했다.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삶을 열망하는 영혼들이 매년 이곳을 찾아 고흐를 만난다.
빌레트의 부엌은 삶의 역경을 긍정하는 가게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와 <자기 앞의 生>을 거쳐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나무’에 이르는 길이 모두 그렇다. 이곳에 담긴 이야기는 멈춰 있는 반짝임이 아니라 짓밟혀도 일어나는 찬란함이다. 꼭 알맞게 담근 술처럼 은은하게 기울여지는 친절이다.
2021. 11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