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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아재 Mar 06. 2022

취미그림인데도 슬럼프가 있다구요?

내 그림이 싫어질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삶은 ‘슬럼프가 있다’와 ‘슬럼프가 지나갔다’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슬럼프가 없는 게 아니라, 슬럼프가 지나갔을 뿐이야.
[다행히 괜찮은 어른이 되었습니다/김혜정/자음과 모음 출판사]      


  취미 그림에도 슬럼프가 있습니다.

  즐겁게 그리려고 시작한 취미인데도 내 그림에 자신이 없어지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 싫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얼마전 저도 오랜만에 슬럼프를 겪었습니다.

  평소 A5 사이즈 정도의 작은 그림을 그립니다. 스케치에 한 시간, 채색에 한 시간, 총 두시간 정도의 시간을 들여 그립니다. 모처럼 큰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항상 제 그림을 칭찬하고 응원해주시는 딸아이 미술학원 선생님께 선물해 드리려고 공을 들여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가로 50cm, 세로 25cm. 평상시보다 6배 이상 큰 종이에 전주 한옥마을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두세 시간을 의자에 앉아 그리니 조금씩 인내력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스케치에 점점 실수가 늘어나고 아쉬운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똑같이 그리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럴거면 사진을 찍어’하는 자기 위안을 주문처럼 되뇌이면서 스케치를 마무리했습니다. 채색은 기와장 무늬를 빼곡이 그려야 하는 스케치보다는 훨씬 수월했습니다.

 그런데, 파란 하늘을 채색한 종이에 이상한 줄이 보였습니다.     

  ‘어? 이물질이 들어간건가?’

  색을 칠할수록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하늘을 자세히 보면 흠집이 볼펜을 그은 것처럼 남아있습니다.

  수채화 패드는 종이 수 십장을 차곡차고 쌓아놓고 3면을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입니다. 한 장 한 장 잘 떼어내야 합니다. 전용 칼이나 커터로 살살 잘라내야 하는데 30cm 쇠자를 넣고 북북 뜯어냈더니, 결국 종이에 흠집이 생기고 물감이 스며들어 도드라져 보인 것입니다.

  원래 수채화 패드는 종이가 울지 않도록 채색까지 하고 한 장씩 종이를 떼어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낱장으로 잘라서 쓰려고 이미 몇 장을 떼어내면서 종이에 흠집을 남긴 것이었죠.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그림이었지만 결국 그 그림은 선물하지 못 했습니다.

  다시 그려야지 하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습니다. 며칠동안 전주 한옥마을 사진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그림도 그리기 싫어졌습니다. 그동안 그린 제 그림도 왠지 못 나 보이고....      


못 그린 그림을 미룬다고 언젠가 잘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뭐라도 그려야 한다. 매일 그릴 수 있는 상태로 손을 다듬어 놓아야 한다.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 이연 / 미술문화출판사]     


  컵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럴 때마다 찾는 것이 ‘컵드로잉’입니다. 막상 잘 그릴 자신이 없거나 그리기 싫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가볍게 그리는 방법입니다.

  12oz짜리 작은 종이컵, 미끌미끌하고 둥근 표면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처음 컵에 그릴 때는 숨을 꾹 참고 배에 힘을 꽉 쥐고 그렸습니다. 그래야 삐뚤빼뚤한 선이 조금 얌전해졌거든요.


  ‘힘 빼자... 힘빼.’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그립니다.

  ‘어차피 잘 그릴 수 없는 재료잖아. 힘 먼저 빼고 끝까지 그리자’     

  지금은 많이 익숙해져서 컵드로잉은 힘을 빼고 그릴 수 있습니다. 조금 삐져나온 선이 마음에 안 들어도 큰 욕심없이 그리면 그럭저럭 볼만한 작품이 나옵니다.

좌-전주 폴스베이커리 카페 / 우-담양 퍼노드파운드 카페

‘그래, 어쨌든 끝까지 그렸어. 잘 했네’하며 스스로 칭찬하는 일까지 마치면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용기가 조금씩 올라옵니다.

(제 특기가 된 컵드로잉은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달 가까이 한옥마을 작품을 그리지 않고 있다가, 가족들과 전주 한옥마을에 들러 다시 사진을 찍었습니다. 똑같은 소재를 두 번 이상 그리는 일은 지루한 일이어서, 사진을 다시 찍었습니다.     



  결국 전체 골자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망적인 시각이 필요합니다. 자질그레한 세부사항은 조금 놓치더라도 큰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요.
  큰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몸을 일으켜 내려다 보세요. 권력감이 느껴지는 높은 자세를 취하고 밑을 내려다보면 큰 골자를 파악하는 데 더 유리해집니다. 우리 눈과 책 혹은 문서 사이의 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리 읽어드립니다 / 김경일 / 한빛비즈 출판]     

  그림보다는 미래에 대한 심리적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글입니다만, 글자 그대로 그림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이전처럼 숨을 참고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오랜시간 앉아 스케치하기 보다는 중간중간 일어서서 제 그림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만만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깟 그림이 뭐라고... 왜 속을 태웠을까’     


작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질긴 의지 하나만 있으면
우리는 언제든 슬럼프를 끝낼 수 있다.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 이연 / 미술문화 출판]      


  10월말이 생일이시던 선생님께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어서야 그림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여전히 액자의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등의 깔끄러운 문제가 눈에 거슬렸지만 기쁘게 받아주시는 선생님과 아내의 칭찬에 기운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걸로 제 슬럼프는 넘어갔습니다.


‘이제 끝! 얼마나 대단한 걸 그리겠다고 이렇게 끙끙거렸을까?’     



그림은 중요하지 않다. 뭔가 바쁘게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모지스 할머니]
[창작면허 프로젝트 / 대니 그레고리 / 세미콜론 출판]     

  슬럼프 극복을 검색해 보면 수험생이나, 운동선수, 그리고 작가 등에게 제안하는 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비슷하더군요.


  슬럼프 해결 방법은 ‘휴식’, ‘변화’, 그리고 ‘완벽함 버리기‘로 모아집니다.     

  제 그림생활의 슬럼프 탈출방법도 비슷합니다. 일단 한 숨 돌리면서 제 자신의 기대수준을 낮추고 그림의 완성도 보다는 그림 그리는 행위의 즐거움에 초점을 다시 맞추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힘빼기’에 있습니다.

  환경이나 작업방식을 바꾸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다만, 슬럼프의 원인을 찾거나 의도하는 환경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골몰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슬럼프에 빠진거고, 자신의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환경을 어떻게 바꿔야할지 알 수가 없거든요. 그냥 멀찌감치 떨어져서 다른 방법으로 시도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새로운 즐거움이나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되는거죠.


  저와 함께 동호회 활동을 하고 계시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최근 출산을 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늘려가고 있는데, 왠지 예전처럼 색감이 아름다운 그림이 안 나왔던 것 같습니다.

  “요새 그림이 이상해요. 사진을 찍어도 느낌이 다르고...”

  “스캔 어플 써보세요. 그럼 사진색감이 더 깨끗해질거에요.”


몇 시간 후 선생님께 톡이 왔습니다.

“곰아재님. 대박! 스캔어플 쓰니까 색이 확 사네요?”

“오! 슬럼프 탈출?”

  기분이 좋아지신 것 같더군요. 무엇 때문에 그림이 예전같지 않다고 생각했을지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점심을 먹고 거실에서 밝은 자연광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출산 후에는 짬짬이 아이가 잠이 드는 시간에만 그릴 수도 있었겠죠. 그렇다면 늦은 오후나 초저녁에 그려서 이전과는 색감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거구요. 그저 제 추측일뿐입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선생님도 이유를 모르니 기운이 빠지신거겠죠.

  그림에서는 슬럼프의 원인을 모를 수 있습니다. 정말 슬럼프에 빠진건지, 슬럼프를 벗어난건지도 알 수 없구요.       

  저의 컵드로잉은 휴식과 완벽함을 버리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환경을 변화시킨 것은 그저 그림을 위에서 바라보는 방법을 시도했을 뿐입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은 기록입니다.

  아침일기를 쓰면서 제 그림에 대해 불만이나 칭찬 등 특이할 만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작업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제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그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새벽에 채색을 하니 더 차분한 느낌으로 그림이 그려진 것 같다.’라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 그렸더니 더 우울해져 버렸다’는 등의 기록을 보면 어떨 때 제가 더 즐겁게 그리는지, 어떨 때는 차라리 그림을 그리는 대신 푹 잠을 자는 것이 더 좋을지 기억하게 됩니다. 일종의 패턴을 기억하게 되는거죠.     


  제가 아는 한, 훌륭한 사람들과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만의 이런 로그 기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기록해 놓은 덕분에 자신을 잘 파악해 역으로 이용합니다. 인간은 의지력과 노력만으로 성공하고 훌륭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이런 날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더라, 이런 복장을 하고 이런 도구를 쓸 때는 이렇게 되더라, 하는 패턴을 깨닫게 만드는 로그를 남기는 것에서부터 성공으로 나아가는 길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같은 노력과 의지로도 패턴을 꿰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결과의 차이가 훨씬 더 커지게 됩니다.
[심리 읽어드립니다 / 김경일 / 한빛비즈]          

  아무렇게나 벗어놓아 뿌옇게 기스가 생긴 안경렌즈는 아무리 닦아도 세상이 뿌옇게 보입니다.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내 기분과 상황, 도구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슬럼프에 빠진 렌즈를 새로운 렌즈로 갈아끼울 수 있는 방법을 찾지말고 그냥 시도해 보세요.

  안경점에서 새 렌즈로 갈아 끼우고 의자에서 일어서면 살짝 어지럽습니다. 하지만 금방 적응이 되고  더 멀리, 더 또렷하게 세상이 보입니다. 당신의 그림 슬럼프도 그렇게 지나갈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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