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쇠의 하울링은 한덕수가 교실에 들어오며 멈췄다.
"어서 자리에 앉아."
모두가 자리로 돌아가 앉고 돌쇠도 자리에 앉아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들썩이며 아침에 한조한테 받은 신상명세서를 펼쳐보았다. 이름에 정신 팔려 다른 내용은 읽어보지 않았다. 이름 밑에 키와 몸무게가 적혀 있었다.
130cm, 27kg.
이게 초등학교 6학년의 키와 몸무게라니. 몸집이 작아 놀림 받는 형우만 해도 작년 신체검사 때 145cm였다. 그런 형우보다 한 뼘 정도 작은 몸을 갖고 형우를 지키러 왔다니 돌쇠는 어이 상실에 기가 막혀 앞에서 떠들고 있는 한덕수의 말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자, 반장 후보로 추천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추천해."
"저는 강형우를 추천합니다!"
돌쇠는 형우 이름이 나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형우를 추천한 녀석은 안창형이었다. 저 녀석도 같은 반이었을 줄이야, 돌쇠는 이를 갈았다. 안창형이 형우를 추천하자 주변에서는 와하는 가짜 환호성에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이건 형우를 괴롭히고 망신 주려고 하는 수작이었다. 형우에 대해서 안 좋은 기억이 있는 한덕수는 아이들의 수작쯤이야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지만 모른 척 형우의 이름을 칠판에 적었다.
"자, 또."
안창형 옆에 앉아있던 김승산이 손을 들었다.
"저는 안창형을 추천합니다."
'어라, 저 녀석도 같은 반이야?'
돌쇠는 악당 미소를 주고받는 안창형과 김승산의 속셈을 알아챘다. 이 반에서 형우를 뽑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안창형에게 모든 표를 몰아주고 한 표도 나오지 않은 형우를 들러리 세워서 자기는 반장이 되고 덤으로 형우를 망신 주려는 속셈이었다. 안창형은 싸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심지어 공부도 잘하는 잘 나가는 녀석이었다. 안창형이 후보로 나오자, 남자애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후보로 나오지 않았다.
"음, 안창형, 강형우라, 이건 너무 뻔한 거 같은데, 뭐 또 없나?"
한덕수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돌쇠는 단전에서부터 솟구치는 분노를 느꼈다.
"저는 연사랑을 추천합니다."
맨 앞에 앉아있던 김혜연이 손을 들고 말했다.
"어이구, 그렇지, 우리 사랑이가 있었지? 추천 잘했다, 혜연아."
연사랑 이야기가 나오자, 한덕수는 목소리에 솜사탕으로 변했다.
"자, 그럼 이렇게 세 사람, 안창형, 연사랑 그리고 아 누구지? 그래 강형우 세 사람을 후보로 하면 되는 건가? 더 이상 추천이나 지원이 없으면 부족한 임원은 나중에 내가 임명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뭐, 다른 의견 없지?"
돌쇠는 전부 짜인 각본 속에서 돌아가는 판처럼 느껴졌다. 단전에서 솟구친 분노는 사고 치지 말라는 한조와 관우의 다짐을 잊게 했다. 돌쇠는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저요! 저는 저를 추천합니다."
벌떡 일어선 돌쇠의 키는 다른 아이들의 앉은키와 비슷했다. 자신을 추천하는 전학을 온 도토리만 한 돌쇠의 행동을 보며 아이들은 벙찐 표정으로 전부 돌쇠를 보고 있었고 그들 속에서 씩씩대고 있는 돌쇠는 마치 불에 달궈진 망치처럼 시뻘게진 얼굴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워대고 있었다. 돌쇠는 멍하니 보고 있는 한덕수를 향해 "뭐, 자기가 자기를 추천하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나요?" 대차게 묻자 그제야 한덕수는 "아, 아니, 뭐 그런 법은 없지." 정신을 차리고 칠판에 돌쇠의 이름, 김석종을 썼다. 안창형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형우는 놀라서 돌쇠를 쳐다봤지만, 돌쇠는 형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못되겠냐 싶어 반드시 안창형을 무찌르고 반장이 되어서 형우가 무시당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자, 후보는 다 나와서 차례로 공약을 발표하도록 해. 공약을 다 듣고 나면 종이를 나눠줄 테니 이 반의 반장이 되어야 할 사람을 투표하도록 해. 우리 사랑이나 창형이 같은 일꾼이 뽑힐 수 있도록 하란 말이지, 알았지?"
한덕수의 말도 안 되는 협박에 아이들은 기가 찼지만 실제로 형우나 새로 온 돌쇠를 뽑아야 한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때까진 그랬다.
드디어 시작된 공약 시간. 안창형이 교탁에 서서 기세 좋게 공약을 말했다.
"나는 이 반을 전교에서 제일 잘 나가는 반으로 만들 거다. 다른 반 녀석들이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게 만들 거야. 내가 이 반을 지킬 테니까 말이야. 하하하!"
안창형의 말에 김승산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다른 아이들도 박수로 화답했다. 돌쇠가 듣기에는 재수가 없는 발언이었지만 안창형이 말하니 반 아이들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안창형이 내려가고 연사랑이 올라와서 공약을 말했다.
"저는 우리 반에 부족한 시설, 예를 들면 공기 청정기 같은 뭐 그런 것들이나, 환경을 위해서 필요한 꽃병, 난초 같은 것들을 학부모회장님에게, 그러니까 우리 엄마한테 제안해서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연사랑이 유려한 언변으로 동그란 안경을 치켜세우며 학부모회장인 엄마를 들먹이며 이 반에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 마련하겠다고 그럴싸한 공약을 늘어놓자, 반 아이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남자아이들은 게임기를 사달라고 하자는 말들을 했고 여자아이들은 블루투스 스피커, 전신 거울 등 아이돌 춤을 연습할 때 필요한 것들을 사달라고 하자는 둥 들뜬 모습이었다.
다음 차례는 형우였다. 다음 차례 나오라는 말에 형우는 주위 애들 눈치만 볼 뿐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그걸 본 김승산이 형우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일으켜 세워서 교탁으로 밀었다.
와하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돌쇠는 화가 나서 웃는 애들을 쭉 둘러보며 노려보았다. 형우는 얼굴을 붉히며 교탁 앞에 섰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머뭇대고 있는 형우를 보며 돌쇠는 안타까움에 벌떡 일어나 대신 교탁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형우가 입을 열었다.
"만약, 저를 뽑아 주신다면…."
"어쭈, 반장이 되고 싶긴 한가 보네?"
안창형의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형우는 움츠러들었다.
"아니, 그래도 공약하라고 해서. 그러니까 저는 반장이 되면…."
형우는 잠시 주저했다.
"저는…. 우리 반을…. 왕따가 없는 반으로 만들겠습니다."
순간, 반에 정적이 흘렀다.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고 공약 끝났으면 어서 들어가. 우리 반에 무슨 왕따가 있다고!"
한덕수의 한마디가 정적을 가르고 형우에게 향했다. 형우는 주눅 든 채로 자리로 돌아왔다. 안창형은 그런 형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돌쇠는 형우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픈 형우의 마음이 느껴졌다. 형우가 왕따가 된 것은 4학년 때부터였다. 안창형이 같은 반이 되고 나서 형우를 대놓고 괴롭히며 왕따 놀이를 시작했다. 그것을 지켜보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돌쇠가 혼내준 것이었다.
형우는 비웃는 아이들을 피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돌쇠는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과 비웃는 아이들을 향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특히 지금도 형우를 눈에 쌍심지를 켜고 죽일 듯이 보고 있는 안창형에서 분노했다. 돌쇠는 분노로 벌게진 얼굴로 성큼성큼 교탁으로 향했고 앞에 서서 말없이 반 전체를 천천히 노려보았다. 지금 돌쇠는 자신이 수호천사가 아닌 130센티밖에 안 되는 조그만 아이인 것을 잊고 있었다. 마치 심판을 집행하는 천사처럼 아이들을 향해 노기 어린 눈빛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 눈빛을 지켜보는 아이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놀라고 있었다.
"만약 제가 반장이 된다면!"
돌쇠의 입에서 마치 의로우신 재판장의 맑고 투명한 그 목소리에 버금가는 소리가 나왔다. 모두가 돌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안창형과 맞짱을 뜨겠습니다!"
돌쇠의 맞짱 선언으로 지켜보고 있던 한덕수의 입이 벌어졌고 반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졌으며 그 모습을 위에서 몰래 지켜보던 의로우신 재판장은 폭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