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함
국어 시간에 <미안함의 동력>이란 인터뷰 글을 읽었다. 인터뷰이 신영전 의대 교수는 제목 그대로 미안해서 더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책도 읽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안 후로는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까지 미안함을 느꼈다고 했다. 책 읽는 것까지 미안해할 필요가 있을까. 처음에는 그의 미안함이 좀 답답했다. 그러다 '남자에, 기득권 교수에, 정규직이란 나의 존재 조건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는 문구에서 그가 느끼는 미안함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성찰이자 우리 사회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여러 가지 불평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애씀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글을 읽으며 몇 년 전 철학 시간이 떠올랐다. 교사와 학생들은 배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배움이란 '놀이터에서 노는 것'과 같이 즐거운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학교에서 각 과목 시간에 학생 아닌 학생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며 실제 고등학생 때 알지 못했던 배움의 기쁨을 늦게나마 느끼고 있던 시기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그때 나는 정말로 수업 시간이 좋았다. 그래서 나의 대답은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어떤 조언을 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순수한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옆에 앉았던 한 학생의 답은 달랐다. 배움이란 두려운 것이라고 했다. 배움이 매 순간 평가로 연결되는 학교 생활에서 한시도 편한 날이 없다고 했다. 학생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교사에, 정규직인 나였다. 불안한 것이 크게 없는 내가 미래의 불투명함에 고민하고 있는 학생 앞에서 배움이 놀이터와 같다는 '순진'한 발언을 하는 것은 적절했을까. 혼란스러웠다. 학생들이 배움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평생을 배우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현실감 없는 교사의 꼰대 같은 마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철학 시간이 끝나고 나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교육과정, 평가 제도 그 어느 것 하나도 바꿀 수 없는 한낱 교사에게는 너무 벅찬 질문이라 결론지으며 답을 찾으려는 마음을 접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질문을 회피한 채 몇 년이 지났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오늘 국어 시간에 <미안함의 동력>을 읽으며 갑자기 그 철학 시간을 떠올렸다. 신영전 교수님의 삶에서 답을 본 듯했다.
그는 약자를 위한 정책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면서도 기득권에 속해 있는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미안함은 그의 동력이 맞았다. 그는 좋은 의사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매 순간 질문하며 산다고 했다. 나는 질문이란 단어에 꽂혔다. 정답이 없다 하더라도 질문을 잊지 않고 하며 사는 것. 그것이 길이 아닐까라고 내게 말씀해 주시는 듯했다. 교사로서 어떤 자세로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들여야 할까. 학생들에게 현재 내가 느끼는 배움의 기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될까. 묵혀두었던 질문이 속에서 올라왔다. 여전히 묵직했지만 예전처럼 풀리지 않는 질문은 아니었다.
국어 학습지 마지막에는 신영전 교수님께 질문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질문을 하고 싶은지를 이유와 함께 적으라는 칸이 있었다. 나는 "미안함이 고마움으로 바뀌었던 순간이 있었나요?"를 질문으로 남겼다. 계속 미안해하며 사는 삶이 너무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 시간 느꼈던 미안함을 오래 가지고 있지 못했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힘들었기 때문이다. 질문을 더 이상 파고들지 않고 덮어두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나는 현실과 타협한 채 회피하며 지냈다고 생각한다. <미안함의 동력>을 읽으며 나의 비겁함과 다시 마주했다. 그리고 그렇지 않게 살아온 사람이 주는 메시지를 받았다. 살다 보면 가끔은 노력하지 않고도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때가 있다. 오늘이 나에게는 그런 날이었다.
글을 읽은 후 질문하며 사는 삶의 힘을 느낀다. 나는 평소에도 질문이 많다. 가끔 주변 사람들이 힘들지 않을까, 번거로워하지 않을까 라는 자기 검열을 하며 고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었는데 잠시 보류해 볼까 싶다. 질문을 가지고 사는 건 언제 어디서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함께 삶을 살아가는 한 나는 배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받을 것이다. 그때마다 피할 수는 없지 않을까. 여전히 나에게 배움은 놀이다. 그것을 숨기진 않을 생각이다. 대신 불안해하는 학생들에게 미안함을 함께 전하면 어떨까.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서 세상을 좀 더 안정적으로 만들어놓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그것을 안고 살아간다면 학생들과 나의 배움에 대한 생각이 좀 더 잘 연결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 하루가 배움으로 가득 찼다. 지금 내가 느끼는 기쁨을 학생들도 누리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