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말이다. 오늘도 피로가 온몸에 붙어 있었다. 일을 하다가 잠시 쉴 틈이 생기자 갇혀 있던 정신이 반쯤 나갔다. 이왕 나간 김에 5분만 쉬자 싶어 그대로 멍하게 먼 산을 바라봤다. 학교 안이 답답해 상대적으로 산은 더 멀리 있는 듯했다. 시원한 산바람을 맞고 싶었다. 당장은 갈 수 없는 곳이라 더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참자. 곧 방학이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뻑뻑한 눈을 몇 번 껌뻑거리니 따가워 영혼 없는 눈물이 나왔다. 옆에 있는 동료 교사가 느닷없이 흐르는 내 눈물에 놀랄까 봐 알아채기 전에 서둘러 닦았다. 시간이 지나며 눈의 통증도 차츰 가라앉았다. 그제야 멀리 있던 산도, 잠시 안 보이던 컴퓨터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모니터에는 아직 덜 끝낸 서류가 펼쳐 있었다.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퇴근 시간 2시간 전이었다. 뭐라도 하나 먹어야겠다 싶어 냉장고를 뒤졌다. 며칠 전부터 벼르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다른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얌전하게 누워 있었다. 들고만 있어도 시원한 얼음보숭이었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야심 차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시원하고 달달한 것이 목구멍으로 쓱 들어왔다. 찬 기운에 몸이 순간적으로 떨렸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틀림없었다. 나는 최대한 이 순간을 늘리고 싶어 첫 입으로 귀퉁이가 사라진 아이스크림을 더는 깨지 않고 서서히 녹이기로 했다. 찹찹한 액체를 삼킬 때마다 피곤함이 조금씩 가시는 듯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구강기는 출생 후 21개월까지라 했다. 나이를 꽤나 먹은 나는, 무의식에만 남아 있는 구강기 때의 경험을 되살려 혼자서 입을 놀리며 시원하게 놀았다. 5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단맛이 아쉬워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후에도 몇 번 더 쩝쩝거렸다. 그리고 쉬는 김에 5분만 더 쉬자며 축 늘어진 채 게으름을 부렸다. 내 마음대로 얻은 보너스 5분은 처음 것보다 더 달콤했다. 다음에 학생들이 나와 같은 태도로 쉬는 시간을 늘리고자 꼼수를 쓴다면 한 번쯤은 모른 척 눈감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사이 5분도 금세 지나갔다. 다시 컴퓨터와 씨름할 시간이었다.
오늘은 바빴다. 그리고 피곤했다. 아마 내일도 비슷할 것이다. 복잡하려면 한없이 복잡해 보일 수 있는 하루가 아이스크림 하나에 사르르 녹았다. 할인받아 천 원도 안 되는 아이스크림이 내 인생 난제의 해결책이라니. 그럼 인생 별 거 없다는 건 맞는 말이 아닐까. 비록 몸에 쌓인 피로감이 다 사라지진 않겠지만 우선 임시방편으로 아이스크림에 기대면 될 것 같다. 학기가 며칠 더 남았다. 내일도 오후 3시가 되면 나는 피로와 설렘을 양쪽 어깨에 얹어 놓고 냉장고 앞에서 뭘 먹을지 행복하게 고민을 할 것이다. 일상의 작은 행복은 곳곳에 숨어 있다. 내일도 매의 눈으로 숨은 것들 하나씩 찾으며 지내야겠다.
대문사진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