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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Jul 24. 2024

처음 뵙겠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것을 대하는 법

분명 읽었었는데….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책들이 있다. 하긴, 가끔은 지금 내 손에 들고 있는 책 앞부분도 생각나지 않으니 오래전 책 내용을 잊어버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망각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혼자서 위로도 해 봤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할 거야. 그런데 어느 정도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면 인상적인 부분이라든지 이야기 줄거리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답답한 마음에 괜히 허공에 대고 습관적으로 나를 비교했다. 책을 꽤 정성스레 읽었다는 기억마저도 사라졌다면 억울할 것도 없을 텐데 얄밉게도 그건 기억이 났다. 열심히 읽으면 뭐 하나. 또 금세 까먹을 텐데. 나는 의기소침해져서 처음 보는 책인 듯한 옛날 책을 손으로 더듬었다.     


<빨간 머리 앤>을 필사 중이다. 적어도 2번은 읽었던 책인데 처음 읽는 내용 같아 어이가 없다. 그래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아예 처음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애써도 기억나지 않는 걸 가지고 매달릴 필요는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며 책을 들었다. 필사를 하다 보니 문득 몇 년 전에 이 책 참 좋다며 친구에게 추천했던 것이 떠올랐다. 뭐가 그리 좋았을까. 나는 빨간 머리 앤보다 과거의 내가 친구에게 한 말이 더 궁금했다. 읽다 보면 나오겠지. 앤이 매슈와 처음 만나 마차를 타고 초록 지붕 집으로 가고 있었다. 나도 앤과 함께 ‘처음 가보는’ 길을 따라갔다.     


“근데 저 길은 왜 붉은 거예요?”

“글쎄다. 모르겠구나.”

“음, 저것도 언젠간 꼭 알아낼 거예요. 앞으로 알아야 할 온갖 것을 생각하면 신나지 않으세요? 그럼 살아 있다는 게 정말 즐겁게 느껴지거든요. 세상에는 흥미로운 일이 가득하잖아요. 만약 우리가 모르는 게 없이 다 알고 있다면 재미가 반으로 뚝 줄어버릴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상상할 여지가 없잖아요.”     


필사를 하다가 잠시 멈췄다. 앤이 하는 말에 맞장구를 쳐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인상적인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부끄럼 많은 매슈가 앤의 수다를 조용히 들어주듯이 나와 생각이 비슷한 앤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알아야 할 온갖 것을 생각하면 신나지 않으세요? 그럼 살아 있다는 게 정말 즐겁게 느껴지거든요.’라는 말은 매일 배우며 살고 싶은 내 마음과 같아 덩달아 신이 났다. 잘은 몰라도 과거의 내가 이 책을 좋아한 이유 중 하나는 앤을 보며 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앤과 내가 어떤 점이 비슷하고 어떤 점이 다른지 살펴보며 책을 읽으면 결국에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연결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 우리가 잊어버리는 게 없이 다 기억하고 있다면 세상 사는 재미가 반으로 뚝 줄어버릴지도 모른다. 온갖 기억 속에 파묻혀 앞으로 나가지 못할 테니 말이다. 앤이 하는 수다 속에 자꾸 잊어버리는 것에 대한 나의 속상함을 대적할 적절한 방법도 들어 있었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배움이 시작된다. 모르는 것이 죄가 아니듯 잊어버리는 것도 그렇다. 잊어버리더라도 다시 보고 싶으면 찾아볼 수 있으니 그거면 된 거라 생각했다. 헌책 같은 새책인 <빨간 머리 앤>은 지금 내가 필사하기 딱 적절한 책이었다. 잘 선택했다고 스스로 어깨를 토닥거렸다. 앞으로 몇 개월 간 앤과 함께 지내며 내 마음을 채워 보기로 했다. 책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더 설렜다.   


매일이 처음이다. 그럼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인사말만 잊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배우고 또 배우며 하루를 산다. 여태 읽었던 책들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젠 괜찮다. 다행히 책은 내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망각 능력이 뛰어난 나에게는 새롭게 무언가를 배우는 것보다 잊었던 것을 다시 배우며 사는 게 맞겠다 싶다. 어차피 그것도 내겐 새로운 것일 테니 말이다. 빨간 머리 앤은 자신의 빨간 머리가 싫다고 했다. 내 눈에는 예뻐 보이는 윤기 나는 머리를 싫다고 하니 마음이 안타깝다.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 중에 앤의 빨간 머리 같은 것도 있겠지. 나는 나를 다 몰라서 상상할 여지가 있다. 다시 나를 알아가는 시간 속에 수다쟁이 앤이 있어 심심하진 않을 듯하다. 책이 제법 두껍다. 그래서 좋다. 천천히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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