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한달살이 : 조카와 고모
"아이 참, 발길이 안 떨어지네."
나는 뒤돌아섰다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안기는 친구의 체온을 느꼈어. 뭐? 발길이 안 떨어진다고? 어디서 이런 야무진 말을 배운 거야? 웃음이 났지만 우리의 진지한 헤어짐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참았지. 맞아, 헤어지는 건 어려워. 널 데려다주는 임무가 끝났어도 나도 여전히 교실을 못 떠나고 있는 걸. 솔직히 잘 헤어지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고모는 나이도 많이 먹었으면서 그것도 모르냐고? 그리 말하니 할 말이 없네. 내가 아는 게 많이 없어서 너는 나를 아기라고 하나 봐. 그래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마음은 알 것 같아서 내 발도 무겁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 말도 꾹 참긴 했지만 말이야.
빨리 어른이 되려고 애쓸 필요 없어. 날 봐서 알겠지만 어른은 제 마음 하나도 그대로 표현 못하거든. 너의 말은 마음을 그대로 머금고 있잖아. 그래서 그 말이 귀한 거야. 여운이 남아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도 계속 기억하는 거고. 우린 무거운 발 탓을 하며 몇 분 더 실랑이를 벌이다 겨우 헤어졌어. 돌아서는 길에 동그란 얼굴이 아른거려 먹먹하더라. 아침에 밥을 좀 더 먹일 걸 그랬나. 너는 이제 너무 커서 들어 안을 수도 없는데 여전히 밥은 내가 먹여줘야 할 것 같은 친구였어. 그러고 보니 우린 서로를 아기로 보고 있었네. 아홉 살이나 됐는데 말이야. 얼른 정신 차려야겠다.
며칠 전, 너는 떠돌아다니느라 반년 넘게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는 고모를 호출했어. 집으로 들어서니 반가움과 어색함이 섞인 얼굴로 인사를 하더라고. 나 같으면 삐져서 얼굴을 보려 하지도 않았을 텐데 너는 구김 하나 없는 얼굴이었어. 우린 예의상 5분 정도 내외를 한 후 곧 다시 친해졌어. 그리고 같이 자동차 게임을 했지. 나는 잘 못해서 연신 도움을 요청해야 했어. 그럼 너는 신나는 얼굴로 구출해 줬고. 시간이 지날수록 네가 나에게 가르쳐주는 게 많아지는 것 같았어. 분명 옛날에는 내가 아는 게 더 많았는데 말이야. 고모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기분이 상하진 않더라. 뭐 어때. 모르면 네가 다 가르쳐주니 그걸로 됐지.
네가 학원에 다녀온 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했을 때가 생각나. 나는 습관적으로 내 손 위에 네 손을 얹었지. 순간, 깜짝 놀랐어. 포동한 손가락의 크기가 거의 내 것과 비슷하더라고. 심지어 더 두툼하고 말이야. 아직까지 키는 내가 더 커서 너를 내려다보지만 곧 내가 올려다보겠다 싶더라. 올려다보는 심정이 어떤지 지금 말해 줄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니까 말이야. 많이 굴욕적이진 않다고? 그럼, 다행이네. 앞으로 고모는 잘 내려오고 너는 잘 올라갈 수 있겠지? 쉽진 않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일단, 동등한 눈높이가 됐을 땐 사진 찍어놓자. 그날도 곧 지나갈 테니.
아빠와 있을 때 넌 나와 있을 때와는 사뭇 달랐어. 일단 킥복싱 자체가 아기자기하진 않으니까. 발 차고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착지하는 것까지 해서 양발 40회씩을 했지. 내 눈엔 마냥 대견스러워 보였는데 둘 사이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어. 정확하게 차지 않으면 인정해주지 않는 아빠 앞에서 네 눈은 더 매섭더라고. 둘 다 열심히 하는 성격이라 긴장감이 팽팽했지. 그때 네가 멋있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 나는 땀 흘리는 남자가 좋거든. 귀여움이 단 줄 알았는데 너의 숨은 매력을 보곤 나도 덩달아 신이 났었어. 다칠까 봐 두렵기도 했고 말이야.
아빠와 너는 라이벌 관계가 확실해. 둘 다 놀이에 진심이니까. 잘 놀다가 투닥거리고 화해하고 또 놀고 하더라고. 처음에는 조마조마했던 것 같아. 그래서 진지하게 아빠 마음을 대신 이야기도 해줬지. 그런데 투닥거림에 적응되고 나니 갑자기 둘 사이가 코미디처럼 웃기더라고. 그래서 분위기는 심각한데 나는 눈치 없이 계속 웃기도 했지. 너는 그런 시간 속에서 1센티씩 크고 있었어. 서러우면 엄마 품에 안겨 아기 찬스를 쓰다가 놀고 싶으면 또 아빠한테 가서 눈에 힘주고 말이야. 부자지간이니 약삭빠른 구석은 둘 다 똑같았어. 나는 아무나 이겨라 하고 말았어. 너는 조카고 아빤 내 동생이잖아. 갈팡질팡하는 고모가 미덥지 못하겠지만 내 입장도 이해는 되지?
네가 다니는 학원을 같이 오고 가며 나는 네 엄마를 느꼈어. 내 엄마도 아닌데 우리가 친구라서 다 같은 엄마란 생각이 들었나 봐. 힘들게 조카를 키워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너도 그 마음은 알고 있겠지. 네 말대로 엄마는 너의 제일 친한 친구니까 말이야. 엄마 비밀 하나 가르쳐 줄까? 네가 자동차 게임을 좋아하듯 엄마는 가끔씩 혼자 있는 걸 좋아해. 조용하게 잠을 자거나 책을 읽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대. 몰랐지? 그러니까 가끔은 엄마한테 "나 숙제할 테니 엄마도 조용히 엄마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말해줘 봐. 그럼, 엄마가 쉬고 난 후 기분이 좋아져 네가 자동차 게임할 시간을 5분 늘려줄지도 몰라. 이건 비밀이니 내가 알려줬다고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엄마로부터 요즘 네가 죽음에 대해 질문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내가 할아버지가 되면 고모는 죽어요?"라고 했을 때 나는 그렇다고 말했지. 네가 할아버지가 될 시간은 한참 뒤니 지금은 재미있게 놀자고 덧붙이면서 말이야. 너의 깊은 속을 다 읽을 수 없어서 네가 원하는 답을 내가 했는지 알 수 없어. 나는 그저 네가 자연스럽게 세상을 배워가길 바랄 뿐이야. 그 길 위에서 나는 너의 친구로 지내고 싶을 뿐이고. 네가 많이 가르쳐줘야 할 친구 말이야. 너는 아홉 살일까, 아흔 살일까. 가끔 헷갈린다. 역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맞나 봐.
에고, 고모 넋두리가 너무 길었네. 이제 그만 할게. 다음 만날 때까지 잘 지내. 요즘 많이 더우니까 샤워도 자주 하고. 원래 여름이 이 정도로 더운 건 아니었는데 어른들이 잘못 살아서 더 더워지는 것 같아. 더워서 허덕이다가 집에 들어와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네 모습이 눈에 선해. 그땐 안쓰럽고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면 네가 조금이라도 더 시원해질까. 가끔 막막해질 때마다 너를 기준 삼아 생각을 시작해. 너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라 허투루 길을 가르쳐주진 않으니까. 그래서 고마워. 우리 가족이 똑바로 살 수 있도록 기준을 잡아줘서,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나의 친구가 되어 주고 있어서. 너는 우리 가족에게 그런 존재라는 걸 잊지 마. 언젠가 네가 흔들릴 때 지금의 너처럼 우리 가족이 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도 말이야. 말이 또 길어지겠다. 오늘은 내가 많이 주책이네. 진짜 그만 할게. 많이 사랑해.
아홉 살 같은 친구, 고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