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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Aug 13. 2022

왼손 필사를 시작하다.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다.

<미움받을 용기>는 친절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특히 트라우마조차 내가 선택한 것이란 말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그딴 선택을 한 기억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인정욕구를 직면하는 시간은 더 힘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며 미운 내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보호본능과 싸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울기도 하고 화도 내면서 책을 두 번 읽었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더니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은 두 번 읽는 후에도 여전히 불친절했다. 

<2022.6.6.-6.7. 필사>

책을 그냥 덮을 수가 없었다. 읽은 것을 몸에 좀 더 흡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던져지지 않는 책을 손에 쥐고 한참을 고민했다. 들은풍월은 있어 독서의 끝은 필사라는 말을 떠올렸다. 필사가 정말 방법이 될 수 있을까. 며칠 고민을 하는 동안 <미움받을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와 하며 필사에 대한 내 생각을 꺼냈다. 책을 좀 더 곱씹어 보고 싶은 내 의도를 이해한 친구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피식 웃으며 왼손으로 쓰기를 추천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슬쩍 왼손을 쳐다보았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손이 내 시선에 멋쩍은 듯 움츠러드렀다. 친구 따라 나도 그냥 피식 웃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자신감 없는 왼손은 <미움받을 용기> 앞에 위축된 나와 같았다. 친구의 말이 그냥 농담으로 흘려지지가 않았다. 필사도 처음인데 그것을 왼손으로 하는 것이 가능할까. 해 본 적 없는 일은 머리만으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위축된 채로 책을 마무리짓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 생각이 난다면 일단 그냥 하자 싶었다. 다음 날 공책을 펴고 왼손에 연필을 쥐었다. 쥐는 방법도 정확히 몰라 어색했지만 연필이 내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게 손가락에 힘을 꽉 주고 글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 획 한 획이 꼬불거렸다. 힘이 없는 왼손에 쥐어진 더 힘없는 연필의 힘듦이 느껴졌다. 많이 쓰지도 못하고 시간이 지나갔다. 끝나고 나니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손가락을 마사지하며 스스로가 싱거워 괜히 멋쩍게 웃었다. 


다음 날에도 연필을 왼손에 쥐었다. 전날 적었던 꼬부랑 글씨체가 날 보고 짓궂게 웃는 듯했다. 왼손 안에 얼마큼의 가능성이 있을지 궁금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릴 적 오른손도 처음엔 그랬을 테니 시간이 지나면 왼손도 비슷해질 거라 믿어 보기로 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천천히 눌러 적었다. 꼬불거리는 글씨체는 여전했지만 한 획에 쏟는 정성은 오른손과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정성이 들어가서 그런지 왼손으로 쓴 필사본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내 글씨체가 하나가 아니었구나. 내가 아는 내가 다가 아니구나. 어설프지만 정성스러운 내 모습을 좀 더 다듬어 보기로 했다. 시간이 내 편이라 든든했다.   


한 달 정도가 지나니 미미하지만 왼손에 힘이 조금 생겼다. 남들이 보면 여전히 꼬불거리겠지만 내 눈에는 분명 획이 조금씩 허리를 펴는 듯했다. 천천히 적을 수밖에 없으므로 내용을 곱씹을 시간도 늘어났다. 왼손은 서툰 것이 아니라 나에게 시간을 주고 있는 거였다. 무능력한 것이 아니라 오른손에 밀려 여태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이었다. 왼손은 내게 필사를 하는 나를 보는 시간, 미움받을 용기를 낼 시간을 주었다. 흐느적거리는 필체에 정성스러움이 뚝뚝 떨어졌다. 내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끼었나보다. 세상 어느 것보다 예뻤다.    

<2022.8.3.-8.4. 필사>

필사를 한 지 두 달이 넘어간다. 아직 책의 3분의 1 정도밖에 하지 못했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빨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왼손 필사는 나만의 놀이다. 책을 더 이해하고 싶어 필사를 시작했지만 필사를 하면 할수록 책에 대한 욕심이 줄어든다. 그저 오늘 내가 적는 부분에 재미있는 것이 없는지 찾아볼 뿐이다. 마음을 버리니 천천히 책이 보인다. 이것이 몸에 힘을 뺀다는 뜻일까. 잘하려는 욕심을 믿음으로 바꿔본다. 하루 24시간 중 천천히 행동하면  할수록 더 칭찬받는 유일한 시간. 역행하는 이 시간이 짜릿하다. 앞으로 내 글씨는 어떻게 다듬어질까. 오른손과는 다른 필체를 가지면 좋겠다. 왼손이 미움받을 용기를 가질 수 있길 바란다. 내 안에 두 필체가 있다. 꽤나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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