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씩 계획대로

대만 한달살이 : 일상

by 마나

"따뜻한 아메리카노 작은 컵으로 드릴까요?"

계산대 앞에서 내가 막 꺼내려던 말을 종업원이 대신했어. 내가 널 좀 안다는 눈빛으로 말이야. 하긴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메뉴를 3주째 시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예기치 않게 해야 할 대사를 빼앗긴 나는 웃으며 평소보다 더 크게 "谢谢(xièxie, 씨에씨에-고맙습니다)"라고 했어. 그러고 보니 우린 매일 만나 기계처럼 똑같은 주문을 주고받았었구나 싶더라. 그 시간이 쌓여 오늘의 작은 웃음을 만들어낸 것이 재미있었어. 단골로 인정받은 것 같아 카페가 더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말이야.


카페 종업원의 눈빛은 요가 학원에서도 보곤 해. 나는 요가도 매일 하거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요가복을 입고 나타나지. 수업이 끝나면 다음에 참여할 수업을 미리 예약하곤 하는데 내 대답은 늘 "Tomorrow Morning"이었어. 매일 오는 나를 보며 처음에는 접수하시는 분이 살짝 놀라는 것 같았는데 이젠 수업을 끝내고 다가오는 나를 보며 그분이 먼저 말씀하셔. "Tomorrow Morning?" 그럼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지. 그리고 새로 배운 "再见(zàijiàn, 짜이찌엔-안녕히 계세요.)을 말하며 학원을 나와. 아직 입에 붙질 않아 자꾸만 "Bye-bye"가 먼저 나오지만 꼭 중국어로 마무리를 하려고 해. 낯선 말도 하다 보면 자동으로 나올 때가 올 거잖아. 매일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기다림의 힘을 길러. 가다 보면 오늘처럼 작은 웃음이 터질 때가 올 거니까. 때가 될 때까지 묵묵히 걸어가는 그 시간이 나는 좋아.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내가 MBTI 유형 중 J(계획형)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평생 P(충동형)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특히, 대만에서 한달살이를 하는 날 누가 본다면 어이가 없어 웃을 정도지 않을까 싶어. 매일 하는 게 똑같거든. 더운 날씨 탓에 실내 활동만 하다 보니 더 일상의 틀이 생긴 것 같아. 이젠 계획한 대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일 끝내고 퇴근하는 것처럼 성취감까지 든다니까. 솔직히 한달살이를 시작하기 전에는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야. 휴직 후 나는 내 본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새로 만들어가는 중인 걸까.


어느 카페의 단골이 될 만큼 대만도 이젠 익숙해졌어. 넓은 카페를 가득 매운 중국말도 낯설지가 않고 말이야. 좀 전엔 내 옆 테이블에서 하는 말이 갑자기 이해가 되는 거야. 그래서 순간 내가 중국말을 알아듣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들더라고.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에 정신 못 차리고 옆으로 계속 몸이 기우는 걸 느꼈어. 그리고 아쉽지만 자리를 바꿨지. 남의 이야기를 엿들으면 안 된다는 도덕성 때문이 아니었어. 쓰던 글을 계획대로 다 못 쓰고 하루가 지나갈 수도 있다는 조바심 때문이었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계획적이었지? 낯선 자신을 바라보며 나는 신기해서 혼자 웃었어.


철학자 칸트는 오후 3시마다 산책을 했었대. 사람들도 그가 산책하는 걸 보며 3시라는 걸 알아챘다고 했지. 예전엔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칸트의 산책이었는데 지금은 그의 삶이 조금은 이해가 돼. 나는 그가 일상의 반복을 통해 삶을 조금씩 더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싶어. 나도 매일 요가를 하며 어제보다 더 유연해진 오늘을 느끼니까. 하루가 쌓여 한 달이 돼. 언젠가 내 다리가 완벽한 일 자로 뻗어지게 되면, 나는 굽었던 다리와 함께했던 시간을 되돌아보고 싶어. 평범했던 하루가 쌓여 이렇게 멋진 날이 됐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어때, 지루해 보이는 일상 속에 답이 있는 게 맞는 것 같지?


커피 맛이 좋아. 글도 잘 써지고. 오늘 하루도 계획한 대로 무사히 흘러가려나 봐. 내일도 나는 기꺼이 오늘과 같은 하루를 살 거야. 그리고 내일 이 시간쯤 계획대로 얼마만큼 살았는지 다시 살펴보겠지. 삶은 매일 리셋이 돼. 그래서 한 달보다는 하루에 더 신경을 쓰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 그러다 보면 한 달은 자동으로 채워질 테니까 말이야. 나의 한달살이도 이젠 가을로 접어드나 보다. 새로운 걸 찾기보다는 여태 있었던 시간을 정리하고 싶은 걸 보면. 깊은 명상과 함께 겨울로 잘 접어들 때까지 하루씩 계획대로 일상을 잘 유지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