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함의 폭력성

by 고니크

나는 회피형이다.

상대에게 삐지면 대화로 풀 생각을 하지 못하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한 후 결론을 내려버리는 타입. 갈등 상황을 직접 대면하는 것이 무서워서 결국엔 '근데 어차피 다 내 잘못이긴 해'로 모든 상황을 마무리 짓는 타입. 예를 들어 어떤 식이냐면...


18년 동안 함께했던 강아지 마시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내가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친한 친구에게 괜찮냐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서운했다. 내가 만약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가 먼저 연락했겠지. 나 너무 힘들다, 너의 괜찮아?-힘내라는 말 한 자락이라도 듣고 싶은데 나한테 연락 없는 너 너무해. 서운해.


그러면 답장이 왔을 거다. 나는 너무 힘들 때 혼자 갈무리할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게 위로라고 생각했어 라든가 미안해, 내가 거기까지 생각 못했네 라든가. 하지만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 내 사고회로는 남다르게 흘러간다.


[어떻게 내가 힘들 때 괜찮냐고 들여다보는 연락을 하지 않을 수가 있지? 나는 걔가 힘들 때 버선발로도 뛰어가는 사람인데. 걔는 나랑 즐겁고 신나는 이야기만 하고 싶고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는 안 하고 싶은 건가? 그게 진짜 친구가 맞나? 자기가 우울할 때 내가 모른 척하면 나한테 서운해할 것 같은데. 서운하다고 너의 연락을 기다렸다고 먼저 연락해볼까? 아냐. 그러다가 "아 맞다 너한테 그런 일 있었지 까묵"이라거나 "부정적인 얘기는 옮는 법이거든. 혼자 갈무리해줄래."라는 답장이 오면 어떡해? 내 걱정이 진짜로 밝혀지면? 안 돼. 그런 일을 겪을 순 없어.]


서운하지만 나는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대신 예상치 못한 결론을 내린다.


[친구 관계는 난로처럼 대하라고 하잖아.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그게 제일 건강한 관계라는데... 맞아. 내가 잘못 생각했다. 사실 그 누구도 나의 불행을 신경써줄 필요없지. 그런 걸 기대하고 바라는 내 문제지. 나는 왜 이렇게 사람한테 높은 기대를 할까... 사실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는 건 그들 잘못이 아닌데. 나는 왜 난로에 너무 가깝게 다가가는 사람으로 자랐지? 이런 내가 너무 싫다. 역시... 모든 게 내 잘못이다.]


하하하!


나를 아주 괴롭혔던 사람이 있다. 나를 내려깎는 말을 하고, 나를 제 종처럼 부리는 사람. '야 그렇게 생각하는 너 잘못이야. 아무도 너처럼 생각 안 해'라거나 '니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또는 '나는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그걸 문장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꼬아서 받아드리는 건 너 잘못 아니야? 난 앞으로도 나쁜 의도 없을 거니까 너가 알아서 좋게 알아들어' 같은 말을 했던 사람. 준비 되지 않은 나를 마음대로 자기 바운더리 안에 넣고 아무렇게나 주물렀던 사람.


그때도 [내 잘못이지. 이런 취급을 할 뭔가를 내가 먼저 제공했겠지. 내가 뭘 제공했을까? 이걸 다시 겪지 않으려면 난 어떤 걸 고쳐야 할까?] 내내 생각했고. 결론이 나지 않자 결국 폭발해버렸다.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못 참고 폭발하는 경우를 애초에 만들지 않았겠거니와, 설령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대화로 잘 풀거나 아니면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서서히 멀어지는 식의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건강한 나는, 전과는 다른 매서운 말투를 쓰며 짜증을 잔뜩 부리곤 쏟아지는 그녀의 전화를 모두 거절 - 차단의 루트를 밟았다.


끊고 싶었던 사람을 결국 끊어냈지만 속이 시원하지 않았고 내가 잘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무서웠다. 내가 또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구나.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나를 비난하겠지. 나는 정말 내가 궁금하다. 나는 왜 이런 인간이 되었나? 왜 이런 결론밖에 못 내리는 사람이 된 거야? 아니아니 애초에 왜 사람들이 너를 재단하고, 깎아내리는 말을 하게 만들어? 애초에 왜 그런 여지를 상대에게 주냐고. 내가 그렇지만 않았으면 좋은 관계로 발전했을 수도 있잖아! ...궁금하다. 나는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못난 행동들을 할 때마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은 말한다. 틀렸어. 그러면 안 되지. 너가 잘못했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그 상황에선 그렇게 했으면 안 됐지. 억지부리지 마. 자의식 과잉 같다. 뭐 등등등...


건강한 사람들은 솔직하다. 건강하니까, 그게 정답이니까 오답을 오답이라고 서스럼없이 말한다. 나는 반박할 수가 없다. 그래요. 맞는 말이니까요. 건강한 사람들은 숨기지 않는다. 건강함의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건 반드시 일러줘야 한다. 사랑하니까. 불건강의 늪에서 꺼내서 구원해주고 싶으니까. 그래요. 저를 교정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건강한 사람이 되어갈 수 있는 것 같... 사실 모르겠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건강해지는지를 계속 들으면서도 나는 건강해지는 방법에서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계속 계속 내가 틀렸고, 고쳐야하고, 그건 안 좋은 거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아 맞지, 맞지. 내가 틀렸지. 와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 이제 어떻게 해. 돌이킬 수는 있을까. 너무 먼 길 같기도 해. 자신이 없어. 그냥... 포기할래. 이런 내가 너무 싫다.]고 생각해버리는 나. 큰 일 난 것 같다. 나는 건강한 정신을 가질 그릇조차 안 되는 사람인 것이다.


내가 불건강해도, 내가 못난이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끔 해주는 친구들이 저기 있을 텐데 말이야. 나는 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기다린다. 슬프게도 건강한 사람은 못난이를 사랑할 수 없고, 못난이만 못난이를 사랑한다. 내가 찾는 사람은 결국 나와 같은 못난이인 것이다.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불건강은 불건강 속에서만 편안할 수 있나봐.


나는 글렀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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