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진짜 이유] 이제 꽃이불은 그만.
"어때? 내 이불 괜찮지?"
기숙사에 업어갈 딸내미 새 이불이 도착했다.
"와우! 정말 어쩜 이렇게 느낌이 좋냐?"
난 새 이불을 볼에 비비며 감탄을 쏟아놓는다.
4계절 차렵이불이다. 포근하고 보송보송, 구름처럼 몸에 착 감긴다. 블루벨벳 색감도 세련되고 가격마저 착하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딸내미 기숙사 입주가 2월부터 계속 미뤄졌다. '이불'에 관해서는 그래도 엄마가 낫겠지 싶었던지 나에게 이불 쇼핑을 맡겼다. 난 몇 날 며칠 인터넷으로 이불을 뒤적이다, 이불 후보들을 줄줄이 딸내미에게 선보인다. 말은 안 해도 표정을 보니 간택받을 놈이 하나도 없다. 딸내미가 직접 이불 사냥에 나서더니, 이렇게 멋진 놈을 업어왔다. 내 눈 앞에 이불 신세계가 펼쳐지고 샘이 난다.
처음부터 난 이불 쇼핑 적격자가 아니었다. 내 평생 내 돈 내고 번듯한 이불 사본 경험이 없다. 한마디로 이불 쇼핑 무경험자다.
이불: 잘 때 몸을 덮기 위하여 피륙 같은 것으로 만든 침구의 하나.
이불 하면 딱, 이 정도 개념밖에 내 머릿속에는 없다. 내가 이불 쇼핑 경험치 '0'인 이유는 엄마의 절친 때문이다. 엄마의 절친은 시장에서 이불집을 한다. 엄마 이불도 우리 집 이불도 모두 그곳에서 공수해 온다.
엄마가 매일 놀러 가는 이불집에는 벽마다 이불이 가득하고, 이불을 펴서 선보이는 널찍한 마루가 한가운데 있다. 이불가게라 부르지 않고, '이불집'이라 부르는 건 그 마루 때문 아닐까?
엄마 장롱에는 그 집 이불이 그득하다. 거의 매일 들르니 새로 나온 이불도 구경하고 철마다 구입을 한다. 내가 집에 내려가면 엄마가 묻는다.
"이 이불 어떠냐?"
"괜찮네~~~"
"그럼 가져가라."
"그러지 뭐~"
그 짧은 대화로 우리 집에도 새 이불이 쌓인다.
이불 품질은 참 좋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가볍고 어떤 건 적당히 무겁고. 내 돈 안 들이고 비싼 새 이불을 득템 하니 이보다 좋은 일은 없다. 모두 알록달록 꽃이불이라는 것만 빼면. 북유럽 인테리어까지는 아니더라도, 미니멀리즘에 소박하고 깔끔하게 살고 싶은데, 침대든 바닥이든 이불만 깔면 게임 끝난다. 색깔과 무늬가 어찌나 화려한지 펼쳐놓으면 북유럽이고 나발이고 모두 쏴~악 정리가 된다. 그냥 꽃이불 인테리어로.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평생 꽃이불만 덮고 살게 될까 봐.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평생 꽃이불만 덮고 살게 될까 봐. 내 이불 내 손으로 선택할 자유도 못 누리고 죽을까 봐.
찰스 다윈은 자연계에서 색채는 주로 유혹, 위장, 경고용으로 쓰인다 말했다. 내가 그 알록달록 현란한 꽃무늬 이불을 덮고 짝을 유혹하기엔...(쫌 늦은 감이 있다.) 그걸 덮고 내가 아닌 척 위장하기에도...(집에 인간이 너무 없다. 인간은 남편과 나, 둘 뿐이다.) 그렇다고 '나한테 다가오면 넌 위험해!'라고 경고하기엔...(그러기엔 우린 너무 오래 평화롭게 살았다.) 그냥 내 이불이 그렇게 화려한 '컬러의 힘'을 발휘하는 건 엄마가 이불집 아주머니와 절친이어서 그렇다.
"색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곧 내 감정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내 감정과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과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색채는 눈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지만, 그다음에는 가슴으로 간다. 색은 감정과 긴밀히 엮여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캐런 할러 <컬러의 힘>
딸내미의 보송보송 블루벨벳 이쁜 이불을 보니, 나도 시집올 때 해온 무거운 솜이불 이참에 다 버리고 새 이불 사고 싶다. 100L짜리 쓰레기봉투 2개에 솜이불과 댕댕이가 물어뜯어 너덜너덜해진 이불 7채를 꾸겨버린다. 백 년 묵은 체증이 이제야 내려가는 기분이다.
그동안 왜 그렇게 오랫동안 이불을 버리지 못했을까?
1. 이건 엄마가 결혼 때 해준 거니까 못 버려.
30년이면 강산이 세 번 바뀌고, 이불 해 준 엄마도 뭘 해줬는지 가물거릴 시간이다.
2. 비싼 건지도 몰라.
비싸고 좋은 거 해주셨을게다. 이불도, 이불의 가치도 세월 따라 변한다.
3. 솜 터서 재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솜틀집 찾아보니 20만 원쯤 든다 한다. 이불 끌고 가서 솜 트고 새 이불 만들 기운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다.
4. 엄마가 나중에 우리 집에 와서 이불 찾을지도 몰라.
엄마는 뭘 주고 나면 5년쯤 지나 묻는다. 기억력도 좋다.
"내가 준 쎄무 잠바 김서방 아직 입고 다니지?"
우리 집 장롱 열고 이렇게 물어볼까 걱정된다.
"내가 너 결혼할 때 해준 목화솜 이불은 어딨냐?"
엄마! 제발 좀 잊어버리세요. 30년이라고요!!!!
5. 손님 오면 덮을 이불 없으면 어쩌지.
자고 갈 손님 없다. 시댁은 가까워 자고 갈 일 거의 없고, 친정은 멀어 내가 가지 부모님이 오실 일 거의 없다.
엄마가 나를 생각해서 챙겨준 마음보다, 내가 그 이불 덮으면서 짓눌린 무거움이 더 컸나 보다. 이불 7채를 버리고 나니 장롱도 숨을 쉬고, 나도 숨을 쉰다.
"프랑스인은 돈이 생기면 주로 눈에 아름답다거나 촉감이 부드럽거나 향기가 좋은 물건을 사는데 돈을 쓴다. 일터에서 집에 돌아오면 혼자 집 안에 좋은 향초를 켜놓고 음질 좋은 음향 기기로 음악을 듣거나 귀한 천으로 만든 이불을 뒤집어쓸 때 느끼는 감각을 좋아한다."-조승연 <시크하다>
나도 이젠 꽃이불은 킥하고, 보송보송 가벼운 구름 이불 사서 뒤집어쓰고 좋아해야겠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