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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공여사 Aug 21. 2020

엄마, 그러다 주유소에  불 지르겠다!

[불안의 진짜 이유] 주유도 못하는 인간

"남편! 기름 없다~~~"

"괜찮아!"

"빨간 주유등 떴어! 차 가다 서면 어떡해?"

"버리고 와!"

"......"


친구와 약속은 했고 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타고 보니 기름이 없다. 출발한 지 5분도 안돼 빨간 주유등이 떴다. 불안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상상 속에선 벌써 차가 도로 한가운데 멈춰 섰다. 그런데도 남편은 나에게 기름 넣고 가란 말을 안 한다. 가다 멈추면 차를 버리고 오란다. 그 이유는?


난 주유를 해본 적이 없다. 흑!


면허 딴 지 30년, 장롱에 처박아 둔 걸 빼면 17년 동안 운전을 했다. 미국과 한국에서. 진짜 딱 운전만 했다. 차 타서 'D'에 놓고 핸들 돌리고, 'P'에 놓고 주차만 했다. 17년 운전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주유'를 해본 적이 없다. 차에 기름 넣는 건 100% 남편 몫이다. 눈물이 얼 만큼 추워도, 볼이 빨개질 만큼 더워도 돈 몇 푼 아낀다고 셀프 주유를 했다. 누가? 물론 남편이~~~~~.


"모든 일에는 그 일이 그렇게 된 그럴만한 이유와 과정이 있는 건데, 그런 건 알려고도 하지 않고 결과만 보려고 하는 순간이 많아진다."

- 하현 <달의 조각>


그 일이 그렇게 된 그럴만한 이유는 내가 기계치라는 거다. 엔진, 터빈, 펌프, 발전기, 모터, 나사, 기어, 벨트, 체인, 피스톤, 프로펠러... 이딴 거 하나도 모른다. 기계에는 확실히 '마이너스의 손'이다. 내 손에 만져지는 건 사고당할 확률이 높다.


남편은 어느 날 '나를 위한 책'이라며, <도구와 기계의 원리>라는 책을 사 왔다. 원리를 알면 좀 나아질까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마이너스의 손'이 집 안팎 기계를 부수고 다니는 꼴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가 아닐까? 총천연색 그림으로 꾸며진 책인데, 세 페이지 넘어가지 못하고 덮었다. 쉽게 설명했다는데 하나도 안 쉽다.

이 책이다.

주유 못하는 아내가 답답했던지, 몇 달 전 남편은 실전 1:1 셀프 주유 과외까지 해줬다. 그러고도 내심 불안한지 저녁 먹으면서 테스트를 한다.


"그러니까 네가 설명해봐. 순서대로!"

"뭐, 쉽지~ 먼저 차 주차하고, 주유 버튼 눌러 주유구를 열고, 기계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돼~~~"

"그래. 우리 차 기름은 뭘 넣어야 한다고?"

남편은 긴장하며 묻는다.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난 자신 있게 답한다.

"경유지!"

"맞았어!"

"근데... 경유가 휘발유지?"

"?!?!?!"


남편은 잠시 피운 한줄기 희망을 단숨에 확 꺼버린다. 이러다 우리 불쌍한 호빵이(우리 차 애칭) 못 먹는 기름 다 토해내고, 위까지 통째로 갈아 끼우는 사태까지 가겠다 싶은가 보다.

경유는 디젤이다.

"아니~~~~~~~~경유가 디젤, 휘발유가 가솔린! 내가 미친다 미쳐!"

"그니까. 저번에 내 친구는 기름 잘못 넣어 난리 났대!"

"친구 얘기는 그만하고, 제발 좀 외워라. 외워."

"......"

"그다음엔?"
"기계에서 하라는 대로 원하는 금액 찍고 돈 내면 되지!"

"그래 그다음엔?"
"그거 기름 나오는 주유총 손잡이를 꼬옥 잡아 땡긴 다음, 기름 구멍에 쑤셔 넣어!"

"뭐어????"
남편 입을 향하던 숟가락이 공중에서 길을 잃고 멈춘다.


함께 밥을 먹던 딸내미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끼어든다.

"엄마! 땡기고 쑤셔 넣으면 바닥에 기름 질질 샌다고. 수도꼭지라 생각해. 먼저 구멍에 쑤셔 넣고 땡기라고~~~~"

요즘 20대는 유튜브 때문에 모르는 게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뭘 꾹꾹 눌러서 작동시키는 것은 선수다. 본 투 꾹꾹! 운전도 못하면서 '주유'는 할 줄 안다.


"그러면 진짜 큰일 나~~~~~~ 그냥 하지 마! 주유 절대 하지 마! 내가 평생 차에 기름 빵빵하게 채워놓을게."

남편은 대형사고 방지 차원에서 선수를 친다.

"그래! 엄마. 하지 마! 아무래도 엄마, 주유소에 불 지르겠다. 주유소 불바다 만들고 소방차 출동하고 뉴스에 나면...... 엄만 절대 절대 주유는 하지 마!"


식구라고는 달랑 남편과 딸내미뿐인데, 이렇게 둘 다 필사적으로 내가 홀로 서는 걸 막는다.

그니까, 평생 주유하지 말고 살라고? 기가 팍 죽는다.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주유소에 불낼까 봐.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주유소에 불낼까 봐. 주유도 못한 인간으로 평생 살게 될까 봐.


정신 차리고 이성적으로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점검해본다.

1. '주유'할 줄 아는 인간으로 거듭 난다.

모르니까 불안한 거다. 기름 떨어질 때마다 끌고 가서 내가 주유한다. 알면 별거 아니다. 별거 아니기 전에 주유소에 기름 질질 흘리고 불바다만 안 만들면.


2. '주유'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끝까지 산다.

차에 기름 있으면 타고, 없으면 깨끗하게 포기한다. 남은 인생 최대한 걸어 다니고 운전을 피한다. 운전은 할 줄 아는데 주유는 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자존심 상할 필요 없다. 아무도 관심 없다.


3. '주유'는 못해도 '충전'은 할 줄 아는 인간으로 변신을 꾀한다.

전기차를 사자. 전기차는 기름 대신 전기를 먹으니, 불날까 무서워 안 해도 되잖아~~.

"남편~ 나, 주유 못해도 충전은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호빵이 죽으면 전기차로 코~올?"

"......"

남편은 아무 말이 없다. 아무래도 기계치 원시인 아내에게 충격을 많이 받은 듯하다.


누구에겐 별 일 아닌 일이 나에겐 큰 일인 게 꼭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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