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 만난 것도 아니고 ‘스킨십 합의 계약서’까지 쓰고 시작했다는데…. 자꾸 선을 넘으려고 해서 그만 만나자고 했나 봐. 그런데 그놈이 술 처먹고 새벽에 집에까지 찾아와 창문 두들기고, 진상을 부리네. 혜림이가 무서워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뭔 일 날까 봐 요즘 외출할 때마다 내가 손잡고 다닌다니까.”
혜림이가 아파트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는데, 전남친이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나 ‘얘기 좀 하자.’며 어깨를 움켜잡기도 하고, 외출하려고 나가면 어디선가 숨어있다 쏜살같이 혜림이를 잡으러 뛰어오기도 한다는 거다. 얘기를 들어보니, 찌질한 민낯을 드러내며 매달리는 전남친이 마음 여린 혜림이에겐 이미 공포 대상이다.
친구가 말했다.
“불안해.”
뭐가 불안한데?
“불안해. 그놈이 나타나 또 진상 떨까 봐.”
진상 떨라고 내버려 둬. 불안의 진짜 이유는 뭔데? 말하기 힘들겠지만 세 번째 문장도 뱉어봐.
“불안해. 그놈이 나타나 또 진상 떨까 봐.그러다 혜림이 다칠까 봐.”
혜림이도 내 친구도 불안한 진짜 이유는 같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위협에 대한 생존 불안이다.
친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의자를 잡아당겨 앉으며 친구에게 말했다.
“그럴 땐 방법이 딱 하나 있어.”
오지랖 넓은 내 자아가 이제는 나이까지 먹어, 남의 일 참견을 삼시세끼 밥 먹듯 한다.
“그게 뭔데?”
친구가 혹시나 싶어 집중해서 들을 준비를 한다.
“일단 집에 들어오라 해 놓고, 혜림이보고 그놈 눈을 보고 쌍욕을 적나라하게 하라고 해.”
“뭐? 쌍욕을 하라고?”
친구의 눈은 흰자를 다 드러내고, 친구의 목소리는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들 귀에도 모두 꽂힌다.
뭐? 나보고 쌍욕을 하라고?
“혜림이 전남친은 아직도 미련이 많아. 대니얼 카너먼이라는 행동경제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 기억은 정점과 종점 규칙을 따른다고. 어떤 사건의 클라이맥스와 마지막만 기억한다는 거지. 혜림이와 가장 즐거웠던 일과 좋게 헤어지자고 말한 마지막만 기억하고,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거야. 그럴 땐 그 마지막 기억을 바꿔줘야 해. 그러니 앞에 데려다 놓고 쌍욕을 하라고 해.”
“혜림이가 어떻게 쌍욕을 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친구가 말했다.
“그러니까, 욕을 공부해야지.”
“뭐라고? 욕을 공부하라고?”
평소 내가 엉뚱한 소리를 해도 그러려니 넘어가던 친구도 이건 또 뭔가? 웬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대학 때 우연히 김 열규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한국인 정서에 담긴 욕의 미학과 해학> 뭐, 이런 두리뭉실한 제목의 수업이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내가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욕을 가르쳐 주진 않았다. 그래도 그 수업 덕분에 그런 고민은 했다. ‘비상사태에 바로 써먹을 수 있도록 내가 쓰는 욕의 범위를 조금 넓혀야 하지 않을까? 알파벳 A와 C에서 숫자 10과 18의 영역까지라도….’
일단 평소에 입에 담지도 않는 쌍욕을 입 밖으로 내려면, 철저한 준비와 연습이 필요하다. TED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영상을 찍는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먼저 대본을 만들어야 한다.
자모음 순으로 정리되어있는 한국어/욕설을 ‘나무위키’에서 검색해본다. Yes24나 알라딘에서 참고서적도 한 권 구입하면 좋다. ‘실생활에서 쓰이고 있는 비속어를 구체적인 용례와 함께 일목요연하게 집대성한 본격 비속어 사전’인 ‘국어 비속어 사전’을 추천한다.
욕이랍시고 ‘바보멍청이해삼멍게말미잘’이라는 귀여운 욕을 써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러다 울면서 뛰어와, 자기 가슴을 치면 안아줘야지 하는 환상을 그놈에게 심어줄 수 있다.
그렇다고 조폭 영화를 참조해서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다. 사시미 칼로 네 배때기를….’와 같은 상대방 신변을 위협하는 조폭식 화법은 배제해야 한다.
핸드폰 녹음기 기능을 평소에 가까이하는 전남친이라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료에 해당하는 폭행죄’로 법정 드라마 여주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법정까지 가면 시간은 걸리고 번거롭기는 해도 끝장나는 것은 100% 확실하다. 혹시 평소에 둘 사이가 막가파 중학생들처럼, 친근함을 욕으로 표현하던 사이였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다음에는 내가 쓴 대본을 큰 소리로 소리 내어 여러 번 읽으면서 달달달 외워야 한다. 첫마디부터 쌍욕으로 포문을 열어 상대를 제압하려면, 잠꼬대도 욕으로 할 만큼 욕이 입에 붙어야 한다.
실전에서 흥분은 금물이다. 흥분해서 목소리 떨리고 갈라지면 게임 끝이다. 안 한만 못하다. <30일 완성 목소리 트레이닝> 책이라도 사서 처음부터 끝까지 안정된 목소리의 톤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 너도 한번 해보자
“이런 실용적인 삶의 기술을 왜 학교에서는 안 가르치는지 모르겠어. 과목명은 <매달리는 전남(여)친 깔끔 정리법>도 괜찮지 않니?”
혹 도움이 될까 싶어 내 얘기를 집중해서 듣던 친구는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오는지, 쌍욕 예찬을 해대는 나를 어이없이 바라보다 나에게 일침을 쏜다.
“그런데 자기는 어떻게 그렇게 젊은 애들 심리를 잘 아냐? 혹시 본인 경험담 아니야?”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날이 어둑해지니 후회가 밀려온다. 이 험한 세상에서 생존 불안을 느끼는 친구 딸에게 쌍욕 대본을 준비하라는 그런 말을 조언이랍시고 하고…. 나이가 먹으면 말인지 막걸린지 모를 쓸데없는 이야기를 앞뒤 구분도 없이 늘어놓는 게 큰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