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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공여사 Nov 12. 2019

[불안 시간두고처치1]뇌가  터질 것 같으면, 비서를

월급 안 줘도 되고, 24시간 일하는 애야.

‘누구지? 누구였더라? 아는 사람인데…. 눈이 삔지삔지 조그맣고 키도 크지 않고, 착한 인상에…. 목소리가, 목소리가 분명 아는 사람인데…. 누구더라? 미치겠다. 왜 이렇게 기억이 안 나지?’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던 웬 중년 남자가 나를 아는 체하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 안녕하세요?”

그런데 난…. 기억이 안 난다. 그럴 땐, 아는 체라도 하면 좋은데, 빤히 쳐다보다 해서는 안 될 말을 뱉고 만다.

“그런데, 누구세요?”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난 왜 이렇게 상황 판단 능력도, 대처 능력도 부족한지. 내 말에 몹시 당황한 그분은 헛헛 웃음을 배경으로 깔며 겨우 말을 잇는다.

“정말…. 저 생각 안 나세요?”

“네….”

솔직함이 무기도 아닌데, 또 솔직해진다.


“아, 그러시구나. 생각 안 나시는구나.”  

저, 누군데요 하고 밝히면 될 대화를 당황한 상대도 이상하게 끌고 간다. 내 기억을 여기저기 뒤적이고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어이없는 듯 화난 듯 일그러진 표정의 남자는 자기를 모른다는 사람을 뒤에 남기고 사라진다.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잊는지는 맥락과 빈도와 최근도의 함수이지, 내면의 평화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개리 마커스


난 내면의 평화는 안 얻어도 되니, 제발 누군지 기억 좀 했으면 좋겠다. 아이들 수업을 정신없이 진행하면서도 중간중간 기억을 뒤지느라 탈진 상태다.


 ‘정 선생님이다.’


번개처럼 정답이 튀어나왔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도움을 주신 분인데, 아무리 얼굴 본 지 몇 년이 지났다고 기억을 못 하다니…. 불안하면 외부의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심하면 사람 얼굴도 잘 기억을 못 한다는데…. 난 심하다.


쏟아지는 정보에 과부하가 걸려 뇌에서 필요한 기억을 꺼내 쓰려고 해도 인출이 잘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기억에 자신감을 잃는다. 중요한 일,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릴까 봐 이제 겁이 나고 그 내용을 뇌에게 자꾸 반복시키니, 뇌는 지치고 불안은 커진다. 뇌가 터질 것 같으면, 비서를 둬야 한다.

요렇게 게으른 놈은 비서로 쓰면 안 된다


 나만의 비서, 불렛저널을 써라.’

불안 시간두고처치 방법 첫 번째다.


불렛저널(Bullet Journal)에서 ‘Bullet’은 정보의 중요성이나 종류에 따라 표시하는 작은 기호를 말한다. 불렛저널은 To Do 리스트, 일기, 플래너, 금전출납부, 스케치북 역할을 동시에 하는 통합 자유 다이어리다.


쓰는 방법은 유튜브를 찾아봐도 좋고, <불렛저널> 책을 읽어봐도 좋다. 읽고 나면 바로 쓰고 싶어진다. 너무 현란한 장식이나 꾸밈을 자랑하는 유튜브는 건너뛰어라. 우리의 목적은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지, 노트를 화려하게 꾸미는 데 있지 않다. 캘리그래피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는 영상을 보면, 내 글씨 못나 보여 시작도 못하고 더 불안해진다. 비교는 불안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냥 멋대로, 되는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된다. 불렛저널은 오로지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다이어리다.  


불렛저널도 코끼리 냉장고 넣는 단계처럼 3단계가 있다.

1. 노트를 꺼낸다.

2. 펜을 쥔다.

3. 쓴다.

     

노트는 신중하게 고른다. 보통 3~4개월 매일 끌어안고 있어야 하므로 2,000원짜리 허드레 노트는 피한다. 연애와 똑같다. 생긴 게 일단 마음에 들어야, 만나고도 싶고 손으로도 만져보고 싶다. 노트도 애정이 없으면 눈도 안 가고 손도 물론 안 간다.


펜은 정말 중요하다. 노트가 아무리 좋아도, 펜이 잘 써지지 않으면 말장 도루묵이다. 똥이 질질 나오는 놈도, 종이를 긁어대는 놈도 아깝다 생각 말고 과감히 버린다. 이 세상에 빤쓰가 아무리 많아도 내 엉덩이에 걸치고 있는 빤쓰는 항상 하나뿐이듯, 펜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쓰고 있는 펜은 단 하나다. 그러니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엄지와 검지로 잡고 중지로 받쳐보아, 그립감이 좋고 술술 잘 써지는 기분 좋은 펜을 준비한다.

이제 노트를 꺼내 펼치고, 펜을 쥐고 쓰면 된다.

불렛저널 중 Book Log

“그냥 핸드폰에 쓰면 안 되나요?”

좋은 질문이다. 안 된다. 손으로 적는 아날로그적 방식이 우리를 현재 이 순간에 존재하고 하고, 마음을 챙길 여유를 준다. 그러니 꼭 펜으로 노트에 써야 한다.


“일기는 일기장에, 계획은 플래너에 쓰면 안 되나요?”

그것도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그냥 하던 대로 할 거면 불안 대처 방법 나에게 물어보지 마라.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한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이다. -아인슈타인


나도 불렛저널 쓰기 전에는 여기에 찔끔 저기에 찔끔 약속도 적고, 계획도 짜고, 마음도 털어놓았다. 나중에는 개인 기록이라 버리지도 못하고 쌓아 둔 노트가 산더미였다. 그런데 그러고도 뭘 자꾸 잊고, 놓치고, 잃어버리고 날 책망한다.


상대성이론인지 양자역학인지 그런 복잡한 이론에게 뇌를 내줘야 하는 아인슈타인이나 집에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일화가 멋지지, 우리가 그러면 하나도 안 멋있어진다. 우리는 경찰서 거쳐 노인요양시설에 가있다.    

시간이 나면 점심 먹은 거 그림도 그린다

그래서 난 불렛저널에 다 넣는다. 오늘 할 일도, 석 달 뒤에 할 일도 적고, 읽은 책 목록도, 남편의 건강기록도, 까뭉이의 심장사상충 약 복용 날짜도 거기에 기록한다. 이제는 내가 근력운동 한 달에 겨우 6번 하고 1주일에 4번씩 한다고 우기진 못한다. 베프와 토라져 전화 안 한 지 49일째인데, 아직 한 달도 안됐다고 뻥도 못 친다.


꾸준한 기록은 힘을 갖는다. 계속 쓰면 진짜 힘이 된다. 잠시 멈춰서 기록하는 단순한 행위가 마음의 근력을 키워, 오늘도 잘 살아갈 나만의 자원으로 등극한다.


 해보라니까. 이거 정말 좋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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