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마흔이 넘어가니 마음이 불안해요. 눈가의 주름도 보이고 이제껏 결혼도 안 하고 뭐했나 싶고, 딱히 일궈둔 재산이랄 것도 없고, 연애를 찐하게 해 본 것도 아니고, 직장이 탄탄한 것도 아니고.”
그동안 ‘비혼’을 주장하며 싱글라이프를 잘 꾸려나가던 지인이,마흔이라는 숫자에 겁이 났던지 긴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이사 가려고 혼자 부동산 기웃거리려니 사기는 당하지 않고 계약할 수는 있으려나, 부동산 잘 아는 남자들도 사기당한다 하던데, 저 혼자 집 보러 돌아다니려니, 너무 불안한 거예요.”
“얼마 전에는 차 엔진오일 바꾸러 갔는데 너무 오래 안 갈아 오일이 다 새고, 브레이크 패드도 교체하고, 타이어 위치도 바꿔야 한다며 수리비가 백만 원이 나왔어요. 여자 혼자 가서 왠지 호구된 것 같고…."
불안하다.그 이유는?
불안하다. 혼자 살면서 사기당하고 호구될까 봐.불안의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혼자 살면서 사기당하고 호구될까 봐.결혼 안 한 것 후회할까 봐.
내가 결혼을 안 해서, 옆에 남자(남편)이라는 든든한 빽이 없어서 불안한 게 아니다. 혼자 살 때 불안하면, 같이 살아도 불안하다. 혼자서도 잘 살면, 동거를 하든 결혼을 하든, 주말부부를 하든 다 잘 산다. 결혼을 하면, 든든한 남편이 집 문제도 해결해주고, 차도 바가지 쓰지 않고 수리하고, 아플 때 병원도 함께 가주고, 늙으면 덜 외로울 거라는 생각은 참 거친 생각이다.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은 항상 세트다.
부동산에도 빠삭하고, 차도 잘 알고, 재산도 한몫 있고 직장도 튼튼한 배우자?자신도 그런 사람 아니면서, 그런 남자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상상하며, 지금 나에게 없는 남편이라는 존재를 아쉬워하다니!
결혼을 안 해서 문제가 아니다. 혼자 살아도 함께 살아도 발생할 문제는 다 발생한다. '어떤 문제도 나에겐 일어나서는 안돼!'라는 생각으로 살면서, 조금만 내가 상상하는 모습에서 벗어나면 불안 초조해서 전전긍긍한다.
1. 부동산 모르면 공부하면 된다.부동산 안목 있는 남편, 복잡한 일 손해 안 보고 척척 처리해주는 남편 찾는 게 더 힘들다. 지금 당장 전 월세 구하는 법, 전 월세 계약하는 법, 필요한 것 공부하면 덜 불안하다. 알면 천국이고 모르면 지옥이다.
2. 차 수리하는 곳에서 호구노릇 한 번 했다 싶으면, 다음엔 견적 두 군데는 받아본다. 나도 기계치에 우리 차 에어컨 바람 조정하는 것 10년째 아직도 헷갈린다. 필요하면 정신 바짝 차리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시간과 노력, 에너지는 들이지 않고 손해만 안 보려는 마음이 욕심이다.
3. 아프면 병원 가면 된다. 손잡아줄 남편이 옆에 있으면 좋겠지만, 남편이 의사가 아닌 이상 병나면 의사 얘기 들고, 내가 인터넷 찾아 정보 수집하면서 치료해가면 된다.
결혼 한 사람, 결혼 안 한 사람. 두 가지 상태를 동시에 경험하기는 힘드니까, 다른 쪽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긴 힘들다. 그냥 어느 쪽이든 자기가 걸어가야 할 자기 길을 가면 된다.
혼자 사는 데도 챙겨야 할 것들이 산더미다. 다 잘살겠다고 하는 짓이다. 직장, 가족, 연인, 친구, 건강, 경제문제, 미래계획 등. 결혼하면 이 문제들을 함께 나누니 장점도 있지만, 또 다른 일들이 뇌 터지게 한다. 시댁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면 또 다른 세상이 연결된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생각하면 다 문제고, 이런 일을 겪어가는 과정이 인생이라 생각하면 그래도 살만 하다.
인생을 결혼과 결혼하지 않는 것으로 거칠게 나눠서 비교하고, 내가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부자 보고 ‘넌 돈 많아 좋겠다.’ 근육맨 보고 ‘넌 근육 짱짱해서 좋겠다.’ 서울대 간 친구보고 '넌 서울대 가서 좋겠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을 겪으면서 지금의 이 모습이 되었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하는 말이다.
지금 혼자라면 혼자 잘 살면 된다. 지금 둘이라면 둘이 잘 살면 된다. 애도 있으면 다 같이 잘 살면 된다. 지금 내가 걷는 이 길만이 오직 내 길이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잘 살면 된다.
2월에 결혼을 앞둔 30대 초반의 지인이 말했다.
“8년을 연애하고 결혼하니까 모든 게 부드럽게 진행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매번 싸워요. 매번! 정말 우리가 이럴 줄 몰랐다니까요.”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매 순간이 다른 순간이고, 자기가 마주하고 있는 그 사람도 어제와 같은 사람 아니다. 단 하루만 지나도 다른 시간과 다른 사건을 겪고 온 다른 사람인데, 똑같다 생각한다. 연애 잘했으니 결혼도 무리 없이 잘 헤쳐 나갈 거라 생각한다. 내가 말했다.
“연애를 오래 했지,결혼을 하는 건 첨이잖아요?”
우리는 처음인 일을 당연히 잘할 거라 생각한다. 우리 인생에서 겪는 모든 일들은 다 처음이다. 2020년도 처음이고, 올해의 1월도, 18일도 처음이고, 어제와는 다른가족, 다른 연인, 다른 배우자, 다른 친구를 만나는 것도 처음이다. 모든 게 처음이다.처음이니까 낯설고 서툴고 잘 못한다. 그래도 처음인데 이 정도 하면 잘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