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진짜 이유] 전 놀고먹는 빈둥입니다.
"선생님! 저 현준이에요. 저 임용고시 최종 합격해서 체육교사 됐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제자가 선생님이 된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어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ㅎㅎ"
"원장님! 안녕하세요. 저 경찰 준비해서 경찰 되었다는 소식 전합니다. 꼭 찾아뵙고 이번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오랫동안 가르친 애제자와 2년을 함께 일했던 선생님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연달아 날아들었다. 둘 다 무엇이 되었다. 선생님과 경찰. 그들이 무엇이 된 사이, 난 학원 원장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직업부터 물었다.
"뭐하세요?"
나란 존재를 짧은 시간에 이해하려는 노력인 건 안다. 학원 원장 명함 들고 다니던 Somebody에서 아무것도 아닌 Nobody가 되고 보니, 대답을 고르기가 영 시원찮다.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까 봐. 불안의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까 봐.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할까 봐.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뭐하세요?'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해야겠다고 고민 끝에 답지를 추려본다.
1. 아무것도 안 합니다.
돈 버는 일은 지금 안 하고 있으니 솔직한 답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답을 들은 질문자는 대화를 계속 이어나갈 소스를 단번에 잃고 망연자실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2. 놀고먹는 빈둥입니다.
이것 역시 솔직한 답이지만, '와우, 그동안 많이 벌어놓았나 보다.' 혹은 '남편이 많이 버나보다.'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고, 다소 자학적이며 시니컬한 인상을 준다.
3. 글 쓰고, 책 읽고, 명상하고, 만보 걷고, 강아지와 산책합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일을 친절하게 표현한다. '그러면 뭐해서 먹고살아요?'라는 즉각적인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건 댁이 알아서 고민하시고, 난 내 삶을 충실히 표현하는 문구라 이 답이 마음에 든다.
4. 전업작가입니다.
직업군에 명확히 존재하는 직업으로 답하면 질문자의 마음을 가장 편하게 해 준다. 하지만 그다음 질문은 '와우, 무슨 책 쓰셨어요?' '작가 =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작가 = 책 쓴 사람'이라는 편견을 의심 없이 따르는 족속이니 그 질문의 대답까진 준비해두진 말자.
솔직하게 답한다고 너무 솔직해질 필요까지는 없다. '전, 살인청부업자입니다.' 혹은 '전, 마약 밀매업자입니다.'라든지 점집 도사, 칼춤 추는 무녀나 심령술사 혹은 삐끼라고 말해 질문자의 뇌를 혼란에 빠뜨리고, 맥박, 호흡을 빠르고 거칠게 만들 필요는 없다.
"훌륭한 사람이 돼야지."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
이효리의 명언이 탄생한다. 다른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도 독한 일침도 거침없이 뿜어내지만 그녀는 자기 삶을 산다. 경제적 여유와 자기를 이해해주는 남편이 있어 더 그럴 수 있겠지만, 언제나 초점을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다시 돌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게 이효리의 자존감이다.
뭐가 안돼도 괜찮다. 우리 별먼지들은 이미 지구별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행을 시작했고,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TV 앞에 앉아있지만 언젠가는 이 여행은 반드시 끝난다. 남들 눈치 보고, 남들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치고, 남들 하는 대로 직업을 가지려고 불안해하기엔 인생은 너무 짧고 소중하다. 다른 이들 마음 편하자고 내가 꼭 그들이 아는 뭐가 될 필요는 없다. 내 인생이니, 내 마음의 초점을 그들에게서 나 자신에게로 돌려라. 그래야 내가 잘 산다.
뭐가 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뭐다. 그들이 말하는 Somebody가 아니어도 독특한 나만의 욕망과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Nobody다.
때와 시간은 네가 알 바 아니다. 무엇이 기다리는지, 무엇이 다가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것은 열려 있다. 그 열림 앞에서 네가 할 일은 단 하나, 사랑하는 일이다.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난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다. 무엇이 안돼도 괜찮다. 사랑하는 사람이면 된다. 너와 주고받는 따뜻한 눈빛을, 달콤한 고구마라테를, 강아지와 편안한 산책길을, 새책의 종이 냄새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