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여름 6

by 키키 리리

슬과 혜나는 같은 대학교에 진학했다. 슬은 문예창작과였고, 혜나는 영문과였다. 수업이 없을 때면 둘은 대학가 근처 ‘전람회의 그림’에 앉아 커피를 마시곤 했다.


슬이 책을 읽으면 혜나는 슬에게 말을 걸거나 온몸을 비틀어대며 독서를 방해했다. 그럴 때면 꼭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슬에게 떼를 쓰거나 놀자고 억지를 부렸다. 자유롭고 편안한 상태에서 책을 읽고 싶으면 혜나의 연락을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슬은 그러지 않았다. 상심할 혜나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를 언짢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혜나가 있을 때는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슬이 커피를 마시며 내일을 이야기할 때 혜나는 마치 미래가 없는 사람처럼 오늘만 늘어놓았다. 오늘 너와 뭘 하지? 무엇을 먹을까? 어떤 음악을 들을까?


결국 책장을 덮고 혜나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혜나는 고개를 강렬히 끄덕이며 슬의 입에서 나올 단어들을 고대했다. 슬은 혜나가 여전히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었고 열여덟의 그때보다 감정이 한층 더 커졌음을 느꼈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으며 동시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슬은 이런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고모와 아버지의 사랑은 가족이기 때문에 받는 당연한 사랑이었다. 가족 외에 마르지 않는 샘처럼 강렬하면서도 지속된 사랑을 준 대상은 혜나가 처음이었다.


슬은 자신의 무엇이 혜나를 사로잡았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했으나 사랑의 이유를 찾는 것은 어리석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학창 시절에 읽었던 그 수많은 이야기 속 주인공을 번민과 고뇌 속에 던져 넣은 것도 사랑이었다.


수학을 제일 싫어하던 유리는 수능 점수에 맞춰 겨우 4년제 대학 수학과에 진학했다. 혜나는 유리를 만날 때마다 이 사실을 가지고 놀려댔고 성질이 뻗친 유리는 “너네들, 다시는 안 본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유리는 대학생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그는 막걸리와 소주에 잔뜩 취해 외박을 하곤 했다. 그리고 더이상 슬을 쌀쌀맞게 대하지 않았으나 늘 슬을 보면 할 말이 많은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가 닫곤 했다.


6월의 어느 날, 셋은 카페에 앉았다. 뒤늦게 도착한 유리는 혜나의 옆에 앉았고 그들의 맞은 편에 슬이 있었다.


유리는 오자마자 폭탄선언을 했다.


“2학기에 휴학하려고 신청서를 냈어”


“뭐? 정말?” 혜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업이 재미없어. 등록금도 아깝고. 엄마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려고.”


“남자친구는 뭐래?”


“걔가 뭔 상관이야? 어차피 내 인생인데.” 유리가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그는 무슨 일에 단단히 심사가 뒤틀린 듯 날카로워 보였다.


“우리 유리 참 멋지다!”


이 말이 유리의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그는 혜나를 향해 “이 바보야!”라고 쏘아붙였다. 혜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둘은 눈빛을 교환하며 슬이 모르는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혜나는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는 영화 러브레터 속 주인공인 나카야마 미호처럼 짧은 커트 머리에 종종 커다란 링 귀걸이를 하고 나타났다. 지나가는 누구라도 시선을 끌만한 외모였다.


“혹시 너네 과에 지호라는 애 있니?” 혜나가 슬에게 물었다.


“응. 있지.”


“걔가 자꾸 연락하는데?”


“어? 어떻게?”


“교양 수업 들었는데 같은 조였어. 종강했는데 밥 먹자고 연락하더라.” 혜나가 슬을 쳐다보며 말했다.


휴대폰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 응……. 아니, 친구들하고 있어.”


혜나가 지호야,라고 작게 말하며 잠시 자리를 떴다.


“어때 보여?” 유리가 슬에게 물었다.


“뭐가?”


“혜나 말이야.”


“혜나도 싫지 않은 모양인데?”


“넌 아무렇지도 않니?” 유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슬은 유리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말을 했는지 잠시 고민해야 했다.


슬과 혜나는 규칙적으로 만났다. 서로의 시간표를 교환했고, 비는 시간이면 틈틈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론 아무 말 없이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슬은 혜나에게서 쾌활함과 평온과 단순함을 엿보았다. 다만 그 외의 면은 보지 못했다. 3년째 혜나와 알고 지내는 동안 그의 다정함과 따뜻함 외의 다른 면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당시의 슬은 알지 못했다.


슬의 침묵이 길어지자 유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혜나가 여전히 너를 좋아해.”


슬은 유리의 말을 듣자마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난 혜나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응원할 거야. 그게 설령 너라도. 너보다 혜나가 더 소중하니까.” 유리가 슬을 노려보며 말했다.


유리의 화는 서글픔으로 변했고 눈물이 가득 차오른 유리의 눈을 보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슬은 자신이 모든 것을 무심히, 또는 외면한 채로 때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 태도를 유지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며 살았다.


혜나는 달랐다. 마음을 구석에 밀어 넣고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혜나는 어찌하며 그런 태도를 가졌을까?


강물처럼 고요하게 흐르는 자신의 삶에 유리는 돌을 던지고 혜나는 풍덩 뛰어들었다. 더이상 이런 태도로 삶을 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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