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쌓인다고 지혜로워지나
중학교 1학년 때, 2학년과 3학년 선배를 복도에서 마주치면 무조건 인사했다. 서태지가 '난 알아요' 불렀던 해다. 노란 명찰을 달았던 나는 초록색과 파란색 명찰에 복종했다. 14살에 느낀 사회적인 권위였다. 유사한 분위기는 대학까지 이어져서 "이번 1학년들은 선배에게 제대로 인사 안 하냐."란 메시지에 쫄아들기도 했다. 인사 잘해요 문화는 밀레니엄 세대로 넘어가면서 희석되었다. 내가 고학년일 때 부러 인사하는 후배는 없었다. 왜냐하면 학교에 컴퓨터가 폭발적으로(?) 많아졌기 때문이다. 개인 컴퓨터를 학교에 전원이 옮겨 놓을 정도로. 인사 문화는 선배에게 직접 배워야 과제를 낼 수 있는 세대에 굳어진 것이다.
어느새 나도 꼰대가 되어 속으로 뭘 원하든 세상이 바뀌었다. 각자도생, 개인이 알아서 하는 시대. 세상을 잇는 인터넷 기술이 발달하면서 개인화도 가속되었다. <개인의 취향> 드라마도 있다. 개인은 멋지다. 조직 안에서 공동체에 속한 채 공동 운명 안에 살았던 때와 다르다. 나는 나로 존중받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으며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다. 자아는 점점 비대해진다...
그 자유의 이면에 철저한 고립이 있음을 안 것은 육아 덕분이다. 부모가 되고 나는 내가 별 것 아니란 것을 알았다. 하나하나 모든 것이 어렵고 어설펐다. 뒷짐 지고 지나가는 동네 할머니에게 일침을 들을 만큼 나는 얼치기였다. 그렇다고 도로 부모님과 살기엔 사는 방식이 달라 서로 곤란한데, 잠깐 다녀가는 엄마는 능숙하게 아기를 다루었다. 포대기에 업었다가 등을 기울여 아기를 눕히는 기술은 최고였다. 그제야 어른의 그늘이 아쉬웠지만 엄마는 일주일 후 나를 탈출했다. '우리 집'이란 단어 자체에는 공동생활한다는 의미가 있다. 지금도 어울릴까, 그 말. 지금은 한 집에 살아도 모두가 개인 스크린을 갖고 있다.
꼰대라는 단어가 일부 아버지나 어른을 지칭하다가 사회 전체로 확대된 것은 세상에 경계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처럼 할 일이 정해져 있고 집안 어른 말씀에 따르던 때는, 몸은 고달파도 지금처럼 개개인이 극도의 긴장 상태로 살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 루틴이 육체노동이라 생각이 복잡해지기도 어렵다. 왕복 3시간을 비포장길을 걸어서 통학, 방과 후에는 소 먹일 꼴을 베러 가야 했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 생생한 경험담은 60년 전 부모님의 어린 시절이다. 지금은 오직 가닥가닥 갈라진 최소 단위의 인간, 개인이 있다. 신사임당 시구가 떠오른다. 갈매기는 강릉 모래언덕에 모였다 흩어지고.. 인터넷으로 사람들은 오고 가고. 아기가 자라난 십 년 동안 내내 궁금했다. 모두 이 긴장을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지금처럼 간섭 없는 홀로 선 공간에서 육아든 일이든 이 세상을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은 공명할 지점을 향해 가늘게 진동한다. 읽고 있는 당신이 이 글을 걷어차지 않길 바라며.
강상중 씨는 <고민하는 힘>에서 현대인의 삶은 머리 위에 칼날을 이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문장 하나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엔 못난 놈이라 그렇게 어둡고 불안한 줄 알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의 삶과 그의 소설을 소개한다. 소세키 씨는 그저 까다로워 보이는 일본 할아버지였다. 내가 무지해서 그리 여긴 것이다. 그는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살았던 지식인이라고 한다. 그렇다. 내 멋대로 꼰대로 여긴 소세키는 삶이 무엇인지 물러서지 않고 파고들며 나아간 '옛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분은 쉰 정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젠 나이마저 차이가 확 줄어버렸다.
개화 시기에 소세키 선생 같은 소수의 지식인이 앓았던 신경쇠약은 현재에 이르러 대다수가 겪는 우울증이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말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제목에 확 끌린다(이 책은 읽기 전이다). 고민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소세키 단편소설 <몽십야> 일곱째 밤 이야기 일부를 옮긴다.
소설 속 '나'는 삶이 시시해져서 결국 죽기로 결심하지만 배 밖으로 몸을 던져 검은 물빛에 닿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 그 후회가 밀려오는 순간이 기막히게 묘사되어 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그 배를 타고 있는 편이 좋았다고. 서늘하게 찌르는 듯한 짧은 소설을 읽고, 고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수긍한다. 개인의 삶이 다할 때까지.
타인이 꼰대로 느껴진다는 것은 상대가 연상일지라도 그 사람의 경험이 내게 소용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경험치가 마일리지처럼 쌓였다고 가용 적립금으로 100퍼센트 전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들여다볼 수 있다면, 소설을 통해서라도 옛날 사람의 내면이 읽힌다면 조금 침착해진다. 인간의 고민은 반복된다. 고민에 고민을 더해 짜낸 그물에 사금처럼 반짝이는 지혜를 건질 수 있다면, 삶은 개별 포장되어 고립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