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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순이 Aug 18. 2024

암환자의 인간관계

암밍아웃부터 현재까지 나의 대인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전에는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었는데 질병 앞에 있으니 나를 챙기느라 관계에 소극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가지치기를 하듯 관계를 조금씩 정리하게 됐다. 정리하며 들었던 생각을 꺼내보려 한다. 


1. 친정


의외로 가족이라고 무조건 내편이고, 걱정을 하며 안절부절못하진 않았다. 아빠와 새엄마(이제 그냥 엄마라고 하겠다)는 기독교인이다. 내가 항상 들었던 말은 "기도하고 있어. 이번주에는 금식기도를 들어가려고."라는 말이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기독교인이라서 할 수 있는 최선이 기도일 있지만 그전에 엄마, 아빠니까 나를 보러 오는 게 먼저이지 않나. 당시 코로나 기간이라서 병실까지는 들어올 없었지만 로비에서 어떻게든 잠깐 만날 수는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본다고 해도 부모님이 금식기도까지 하는 마당이면 딸이 많이 보고 싶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보러 오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겠지 하며 위안을 삼았다. 그래서 입원 기간 동안에는 한두 번 오신 게 다다. 물론 내가 오지 말라고 한 것도 한몫하겠다. 


내가 바라는 게 많았으면 아마 여기서 상처를 제일 많이 받았을 텐데, 이전에 정신분석치료를 하며 우리 가족의 특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바람을 조금 내려놓은 시점이라서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이렇게 조금은 덤덤하게 적을 수 있다. 어쨌든 여기서 나는 가족도 자신을 나만큼 아끼고 사랑해 줄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친척들은 한 번씩 돌아가며 방문을 했다. 돈봉투를 쥐어주고 가시거나 반찬을 싸다 주시고 가셨는데, 그 당시 돈이 벌리지 않고 계속 나가고 있는 상태라서 돈봉투가 그리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속물인가 의심도 했다.


2. 신랑


신랑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연차를 내고 병원을 함께 가주려 애를 썼다. 코로나가 심했을 당시에는 요양병원 로비에서도 직접 만날 수 없다고 해서 창문 너머로 얼굴을 맞대고 면회를 했다. 거의 매주 주말마다 와서 직접 투박하게 깎은 멜론을 가득 안겨주고 돌아가곤 했다. 그 껍질이 제대로 안 깎인 멜론을 먹으며 감동에 겨워 울기도 했다. 일이 많고 생각이 많아서 항상 피곤한 사람이라 어디서든 앉아서 잘 자는 타입인데, 항암 주사를 맞을 때 옆에서 코를 골며 잘 때는 정말 서운했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은 하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 또 서운했는지 가끔 신랑한테 얘기를 한다. 물론 그 얘기만 하면 신랑이 억울해서 얼굴이 빨개지기 일쑤다. 가끔 귀엽다.


3. 시댁


시부모님과 시댁어른들 대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결혼 5개월 차에 암에 걸린 게 왠지 모르게 죄송했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은연중에 가족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통상적으로 자식들이 어른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게 일반적인데, 시부모님이 가끔 면회를 오시거나 전화로 내 건강을 걱정하시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지가 않았다. 그냥 죄송해서 그런 생각이 자꾸 든 것 같다. 한 번은 어머님이 문자를 보내셨다. '아가야, 내가 대신 아파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속상하구나.' 표현에 서툰 어머님이 얼마나 나를 아끼시는지 느껴졌다. 내가 얼른 나으면 어머님께 잘해드려야지 되뇌었다. 그런데 퇴원 후에 시댁에 가면 자꾸 설거지도 안 시키려 하신다. 


4. 친구


정말 좋아하고 친했던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연락을 내가 먼저 잘하는 타입이라서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암밍아웃을 하고 나니 좋은 친구로 남아야겠다는 친구가 확연히 갈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를 유지해야겠다는 친구가 손에 꼽혔다.


암이라는 게 35살의 나이에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라서 많이 당황스러웠을 거라 생각한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났을 법도 하다. 전화는 해도 되나. 모든 게 조심스러웠을 거다. 그래서 무반응이었던 친구들도 이해를 한다. 다만 내가 그런 관계까지 유지해야 할 만큼 심적 여유가 없었고, 병원치료에 지쳐서 상대방의 입장까지 고려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연락을 끊었다.


유지한 친구들은 자주 연락을 주거나 병원에 면회까지 오고, 전화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했던 친구들이다. 요양병원에서 누가 나를 괴롭히고 무슨 치료를 받고 있는지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물론 그렇진 않았어도 멀리서나마 응원하는 마음으로 큰돈을 보내기도 하는 친구도 있었고, 전화로 조심스럽게 묻기만 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친구들은 고마운 마음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암에 걸리기 전에는 친구관계를 참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내가 많이 변한 것 같다. 이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가 않다. 평소에 연락도 안던 친구가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든가, 장례를 치를 소식을 전할 때 항상 마음을 전했는데 지금은 그냥 연락도 안 한다. 원할 때만 연락하는 친구는 솔직히 귀찮다. 전화 없이 문자만 해대는 친구도 필요를 잘 못 느끼겠다.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것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삶이 덜 피곤하다. 관계에 있어서 지저분하지 않고 단정해지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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