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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 Lee Jun 26. 2020

매일 같은 자리에서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이 떠오르는 어떤 날에

언젠가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이란 책에서 음식 장사를 하던 그의 집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매일 새벽같이 가게에 도착해 팥죽을 휘휘 저어 푹 끓이고, 상을 닦고, 손님을 맞고, 또 해가 저물면 내일의 재료를 다 준비해 둔 뒤에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식당과 빵집 등 여러 개의 가게를 거쳐간 부모님 덕에 장사를 준비하는 지루한 반복이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일상이자 곧 그의 삶이었기에 그는 소설가가 되기에 매우 유리했단다. 작가의 비결로 그는 매일 똑같은 일을 묵묵히 반복할 줄 아는 끈기와 인내를 강조했다. 그는 소설가의 역량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지만 성실함이 무기가 되는 건 비단 작가의 영역만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재밌는 일도 지겨울 때가 있는 법이기에, 지루함을 참고 묵묵히 견뎌내는 뚝심 같은 것은 어쩌면 우리 삶을 빛나게 하는 가장 큰 비밀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수십 장의 비슷한 계약서를 처리하면서, 복사를 하면서, 혹은 애타게 고객의 전화를 기다리면서 그 책이 여러 번 떠올랐다. 나는 매일 아침 8시 3분 지하철에 올라 9시 10분전 회사 앞에 도착한다. 내 양팔 길이만큼 길고 황갈색이라 조금은 사막 같기도 한 책상에 앉아 비슷한 이메일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고 수십여가지의 크고 작은 행정업무를 처리한다. 


렇게 벌써 10년이 지났다.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벌벌 떨며 면접을 보던 스물넷이 벌써 서른 넷 이 과장이 되었다. 10년째 매일 같은 건물에서 똑같은 일을 묵묵히 반복하는 무미건조한 나의 하루가, 다람쥐 쳇바퀴 안에 갇혀 지루하게 달리는 듯한 내모습이 견딜수없어 괴로운 순간들도 불쑥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란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온 나에게 오늘은 기꺼이 칭찬과 박수를 보내고싶다. 토닥토닥 끌어 안아주고 싶다.

흔히들 성공은 크고 대단한 데서 오는거라 믿으며 그 비결을 찾고 갈망하지만 그의 말대로 매일 똑같은 일을 주구장창 해낼 수 있는 반복의 힘이야말로 성공의 디딤돌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미 나는 무엇이 되기에 충분한 공인인증서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오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솟는다.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성공은 운이다. 우리는 그릇이고 그 그릇에 운이 담길지 아닐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노력하고 있어야 운이 찾아왔을때 그릇에 운이 담길 수 있다"   신해철 님이 살아 계실 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그렇지만 내겐 끈기와 인내가 있으니, 소박하지만 오래된 꿈도 있으니 예쁜 그릇이라도 되어보길 꿈꾸는 밤이다. 한성실함의 힘을 믿어 보련다.



"상점들이 즐비한 역전 제과점의 아들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자영업자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그들에게는 일의 반대가 휴식이 아니라 손해다. 그래서 그들은 휴일에도, 심야에도 가게 문을 닫지 않는다.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당분간 큰 문제는 생기지 않는, 그러니까 매일 일하는 삶이다. 어린 시절에 내가 지켜본 이웃 상점 주인들의 삶은 근면하다거나 성실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들이 아침에 가게 문을 여는 광경은 일출처럼 당연했다. 그러니 어머니가 평생 만든 단팥죽과 팥빙수의 양이 얼마나 될지는 상상조차 못하겠다. 그 그릇들을 쌓는다면 아마도 꽤 높은 탑이 되리라. 내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한들, 그 탑 아래에서는 고개를 숙여야만 하겠지. "

김연수 <소설가의 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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